[국내] 추천여행

충주에서 아이들과 역사공부 겸 가볼만한 국내 유일한 고구려 석비, 국보 제205호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후기 및 포인트 정리

롤라❤️ 2020. 10. 20.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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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고구려와 신라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

아마 역사 책에서 많이 보았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조 고구려 그 중 충북 충주는 고구려 때 나라의 벌판이란 뜻으로 '국원성'이라 했고, 신라 때에는 가운데의 벌판이라는 뜻으로 '중원'이라 했다고 해요.

그러다가 유학을 숭상한 고려 태조에 이르러서 주례의 의미를 살려 충주로 고쳐 부르면서 오늘에 이른 것인데요.

우리나라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충주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고구려, 신라, 백제가 치열한 각축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답니다.

그리고 삼국 중에서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주는 우리나라 유일의 고구려 석비인 고구려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구려비와 함께 풍부한 자료와 영상으로 고구려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이 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은 탄금호와 충주 탑평리 칠층 석탑이 있는 중앙탑 사적공원에서 입석 삼거리 방향으로 3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전시관 입구에 는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 조형물을 볼 수 있습니다.

삼족오는 세 발 달린 상상의 까마귀로 고구려 국내성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벽화나 그림으로 볼 때와는 달리 이렇게 입체적으로 만들어 놓으니 특별했습니다.

입구에 있는 이 조형물을 보고 전시관을 찾으면 될 것 같습니다.







관람코스는 1관 입석마을 이야기, 2관 고구려 이야기, 3관 충주 고구려비 이야기로 나누어지지만 동선을 따라 돌아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 개의 관을 모두 돌아볼 수 있습니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서니 고구려의 기상과 혼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입석마을과 고구려 이야기





충주는 과거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차지했던 지역으로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함으로써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충주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증명하는 문화재로는 우륵의 예술혼이 깃든 탄금대와 고려 시대의 석실 사원인 미륵대원지, 그리고 충주 고구려비 등이 있습니다

특히 고려 시대 대몽항쟁 때에는 충주 지역의 다인철소민들이 당시 최강의 몽고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이 지역이 철제 무기를 다량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네요.







삼실총벽화에 보면 개마무사가 등장을 합니다.

개마란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하는데요.

개마에 탄 기병을 개마무사 불렀고 고구려의 주력부대는 바로 이 개마무사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개마무사를 기마병으로 활용한 것은 고구려가 질 좋은 철을 많이 생산했고 뛰어난 제련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서양에서는 고구려 보다 100년이나 뒤진 1221년 페르시아가 몽골족을 맞아 전투를 벌일 때 비로소 개마가 등장했다는데요.

말까지 철로 된 장비로 무장시켰다는 것은 고구려가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했다는 확실한 증거랍니다.







마침 한 가족이 해설사분의 해설을 들으며 관람을 하고 있었는데요. 각종 연표와 사진들, 영상을 보면서 고구려의 역사를 둘러봐도 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다소 지루한 감도 있어 대충 보고 지나가기 쉬운데 해설사가 역사의 분기점이나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중요 인물에 이르기까지 콕콕 집어서 설명을 해주시니 고구려의 흥망성쇠가 눈과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해설사 예약 : 043-850-7301)



안악3호분





전시장 중간쯤에 가면 고구려 벽화고분인 안악3호분에 대한 설명이 굉장히 많아지는데요.

무덤 안쪽 벽에 적혀있는 것을 보면 이 무덤은 357년에 축조되었으며 '동수'라는 인물의 무덤이라고 하는데요.

하지만 묘주인을 두고 학자들 간에는 이견이 있는데 고구려 고국원왕의 무덤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안악 3호 분 방 구조입니다.

무덤의 규모와 짜임새, 벽화의 구성, 표현 방법이 뛰어나 4세기 중엽 고구려 문화를 복원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요.







서쪽 옆방 내부인 서벽에는 묘 주인이, 남벽에는 묘주인의 부인이 연꽃 봉우리 장식의 장방에 앉아 관리들의 보고를 받거나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묘 주인의 초상은 정면을 향하고 있고 부인은 비스듬히 묘주인 쪽을 향하고 있고요.

동쪽 북측에는 묘주인 부부를 모시는 무인상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특히 높은 지위의 사람은 크게 그리고 시녀처럼 낮은 신분의 사람은 작게 그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앞방의 동쪽 옆방 내부는 각종 생활 도구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디딜방아로 방아를 찧는 하녀, 말과 소를 매어둔 마구간과 외양간, 우물에서 물을 긷는 하녀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하녀들, 고깃간, 차고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250여 명으로 구성된 대행렬도가 한 벽면 가득 CG로 그려져 있는데요.

기역 자 회랑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대행렬도에는 25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행렬은 마차에 탄 주인을 중심으로 주변의 남녀 시종 들과 보병 악대, 곡예꾼, 기마 악대와 기마 기수, 호위 보병과 기병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타고 가는 동물은 말이 아닌 소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라 부르고 신라의 왕을 매금이라고 칭했다는데요.

동이는 중국 중화사상에 기반을 둔 말로써 중국은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에 두고 동쪽을 동이, 서쪽을 서융, 남쪽을 남만, 북쪽을 북적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라고 부른 것은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며 신라는 주변의 작은 나라에 불과하다는 뜻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하의 중심은 중국이 아니라 고구려라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고구려의 기상이 느껴지시나요.



충주 고구려비 이야기





세 번째 관은 고구려비가 있는 곳이에요.

이 고구려비는 우리나라 유일의 고구려 석비로 그 역사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광개토왕비와 함께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이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가 한강 이남으로 진출했던 것을 입증하는 자료일 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중원 지방을 점령했던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초반까지 70년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밝혀주는 내용을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도 크답니다.







비문에는 사면 모두 글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는데요.

고구려 왕이 신라왕에게 의복을 하사한 일도 적혀있고, 고구려의 관등 조직이나 고구려인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으며, 절사, 절교사 등의 이두식 표기가 있어 신라의 이두문자가 고구려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해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가 남쪽으로는 영토의 최남단인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하고 남방 경영의 전초기지로 활용을 했다고 하니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의 남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시원한 실내에서 다양한 영상 자료로 고구려의 역사를 관람할 수 있는 곳으로, 마스크 착용 등 개인위생수칙을 잘 지키며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꼭 한번 들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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