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후기 조선시대의 도시계획, 화성
【1】 조선시대 산성·읍성의 이원구조와 17세기 읍성활성론의 대두
1. 국토의 70%가 산지지형, 평지성보다 산성 발달, 방어에 유리, 물+넓은 골짜기 보유
①삼국시대 산성은 평양(대성산성), 경주(남산성·선도산성·서형산성), 한강주변(아차산성·이성산성)
②고려시대 평상시 읍성 안에 살다가 전쟁 때는 산성으로 피난하는 이원구조 전국적 확산
-우리나라 고유의 성곽제도로 정착, 조선시대까지 연결
2. 산성 발달로 읍성 위축(방어시설 부족), 읍성은 읍치 외곽을 둘러싼 성벽
①관아·객사만 읍성에 존재+백성은 성벽 밖 거주(충청도 서산시 해미읍성)
②수령·백성 모두 읍성 내 거주(전라도 순천시 낙안읍성)
-전국 대부분의 읍성은 ②의 방식, 통치시설과 백성들의 거주지가 공존
3. 통치자와 주민의 생활공간을 성벽으로 둘러싸는 것은 중국·서아시아·유럽에서도 발견
①중국은 2중(3중) 성곽+성벽+외곽에 호(적의 접근방지), 일정한 간격의 치성(돌출부, 감시·공격)
②조선은 중국과 유사하지만 지형을 고려한 불규칙한 형태+호가 없는 차이점 형성
-산성에 의존하는 전통 때문에 읍성은 방어시설이 부족한 것이 중국과 다른 점
-북쪽은 중국과 국경 접하고 있어 방어시설 준비(갑산부·북청부성=성곽을 네모반듯하게 구성)
4. 조선시대 성제는 읍성과 산성이 세트를 이루는 이원적 구조(임진·병자호란 전후 전환기 형성)
①전국 산성수축공역 실시, 읍성의 방어시설 강화 주장(유성룡=치성·옹성·현안·호+성벽 설치)
②실학자 유형원은 산성보다 읍성을 강화해야한다고 주장(백성의 경제활동 장려+경제활성화)
-전국적 경제발전과 더불어 현실화(황주읍성을 시작으로 전주·대구·동래·해주·청주읍성 개축)
-반계 유형원의 주장이 보다 확연하게 드러난 곳은 18세기 말에 축성된 화성
【2】 18세기 신도시, 화성의 탄생: 입지 선정부터 경제부흥까지 중앙정부가 계획
-이원적 성제도의 불합리성 비판+경세치용의 사상을 배경으로 건설된 읍성이자 산성
1. 현륭원의 조성과 구읍치의 이전: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 천장하는 일로부터 시작
①정조 즉위 13년 서울시립대 배봉산에서 수원으로의 천장 결정(1789.7.11.)
-신분에 따른 무덤 명칭은 능(산릉, 왕·왕후), 원(왕세자·빈·후궁), 묘(대군·공주·일반백성)
②수원부 관아 뒤쪽 땅으로 결정, 지역에 살고 있는 백성이주가 관건이라 경제적 보상 약속
-읍치 조성후 구읍치에 살던 이들에게 주택 및 토지값과 이사비용 지불, 무덤 명칭은 헌릉원
2. 신읍치의 도시구조: 구읍치에서 신읍치가 자리한 팔달산 아래 고을로 이주
①신읍치에는 관아·객사·향교·사직단 헌륭원 전배를 위해 왕이 머물 행궁까지 마련
-수원 신읍의 주산인 팔달산을 배경으로 동향에 배치, 기존 고을과 다른 방식으로 구성
②고을은 북쪽 주산을 배경, 도로는 동서를 관통, 관아는 북쪽(남향) 배치가 일반적이었으나
-동향에 관아 배치, 중심부를 한양에서 호남지역을 잇는 도로가 관통, 팔달산은 서쪽
3. 정조대 경제정책과 신읍치의 번성: 삶의 터전을 옮겨 정착하기까지 백성들에게 주목
①읍치 번성을 위한 정책 실시, 금난전권 폐지하는 통공정책 논의(1790, 체제공)
-관아·객사·향교·군영시설 건설, 상업진흥책(낮은 금리 대출) 실시로 상업발전 토대 마련
②1792년 중심도로변에 입색전(비단), 어물전(생선·과일), 목포전(무명·모시·목화),
-미곡전(쌀·담배·국수), 관곽전(관), 지혜전(종이·신발), 유철전(놋쇠와 쇠) 등 설치
-1793년 화성(성인의 축복, 화산이 봉우리보호)이란 이름과 유수부로 승격
4. 정조대 문화정책과 화성공역의 계획: 창덕궁 안에 규장각·봉모당 등 학술적 공간 마련
-봉모당(선대임금의 어필보관), 규장각(고금의 도서 보관), 관료들을 등용하여 연구 지시
-경세치용+실사구시 실학자(중국의 문물과 신문물 경험(정약용과 박제가 등)
-박제가(북학파, 벽돌 활용을 주장, 화성성역공사에 채택)
-정약용(한강 배다리설치, 한강 지형·조선선박제도 정비, 성곽공역 전체계획, 거중기·유형거 고안)
5. 감동당상 조심태의 역할: 수원 읍치 번성, 성곽 건설 계획 =>실학자들의 이론 수용
①화성의 설계와 계획은 실학파 학자들이 구상, 현장에서 감독·변경 처리한 사람은 조심태
-공사현장 총괄 감동당상에 비변당상 조심태, 사무 총괄 총리대신은 체제공 임명
②수원이 삶의 근거지인 조심태는 주민의견 수렴+인근지역에 대한 정보 습득에 유리
-영우원 천장 결정 후 수원부사로 임명, 주민을 신읍으로 이주시키는 역할 수행
-지리적 이해와 정보 덕분에 화성공역 석재 조달, 숙지산·여기산·권동 일대에서 채취
6. 화성공역의 특징: 성역소 조직(조심태) 후 정조18년 2월 공역 시작(1794)
①9월 팔달·장안 대문과 화홍문(복수문) 건립을 위한 터닦기와 하천 물돌림 공사 시작
-북문과 남문의 문루 ->북문의 외성인 북옹성 ->남문의 외성 남옹성 완공
-화성 내로 들어가는 물 감시하는 북수문(화홍문) -> 남수문은 정조 20년(1796) 완료
②돌로 축조된 석성, 포루·공심돈은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방어시설은 벽돌로 축조
-돌·벽돌 혼용(북문·남문·서문·동문 등 4대문의 옹성과 공심돈·노대·암문·봉돈·각구·포루)
-여장·문루·옹성·성벽의 현안은 감동당상인 조심대의 변방지역 근무경험을 바탕으로 설치
③공정에 참여하는 장인과 모군들에게 품삯 지불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 특징
-17세기 중반 백성들이 의무로 국가공역에 참여하던 부역대신 모군제도 시행
-대납가능+강제 동원이 아니라 일꾼 고용이 관행화되기 시작했기 때문
④장인에 대한 강제동원과 부역노동은 18세기 중반까지 유지
-정조대 문희묘(문효세자 사당) 영건공사에서부터 장인들의 기능과 작업 일수에 노임 지급
-화성공역의 특징은 일꾼의 품삯 지급방식과 더불어 재료값 지불 방식
-이유는 석재와 벽돌공급의 효율적인 운반과 관리, 시공의 편의가 목적
【3】 화성의 건축물: 지형을 살려 산성과 읍성의 중간적인 모습으로 건설(한 덩어리 성제)
①성벽: 주산은 팔달산, 동쪽을 내다보는 형국으로 축조, 『화성성역의궤』 산지·평지로 구분
-돌이 주재료, 방어시설은 벽돌 사용,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평균 5m 내외)
-평지를 경사지보다 높게, 성벽 위 여장+총구멍, 석축은 장대석+마름돌(막돌) 사용
-성벽 하부는 큰 돌+상부는 작은 돌, 위로 올라가면서 중간배가 안으로 들어가는 모양
-바깥쪽만 내탁 방식 사용(경사지처럼 흙을 쌓아올려 인공적으로 내탁 축조)
②사대문: 북문(장안문), 남문(팔달문), 동문(청룡문), 서문(화서문)
-서울방향의 장안문과 반대 방향의 팔달문이 화성을 대표하는 성문, 서울성문보다 크게 축조
-도성보다 작지만 각종 시설은 도성보다 월등히 강화(웅성=큰 규모와 격식 갖추어 조성)
③암문: 적이 알지 못하도록 출입구를 내어 사람·가축 통과, 군수품 조달하기 위해 설치
-북암문·동안문·서암문·서남암문·남암문 등 5개 설치, 지형조건에 맞추어 다른 형상
④수문: 광교산 발원->화성 내 관통하는 유천이 유입되고 나가는 곳에 북수문·남수문 설치
-광교산 발원->수원천+영화천을 따라 연못 조성(용연·남지·북지·동지) =>방화수류정
⑤장대: 군사를 지휘+성 안팎을 관망하는 곳, 팔달산 꼭대기(서장대, 관망), 동장대(연병장)
⑥노대: 장대 옆에 설치, 성 밖의 동향+군사명령에 따라 특정한 색깔의 깃발로 신호
-방아쇠를 당겨 활을 쏘는 쇠뇌 사용(노수), 장수가 신호를 확인할 수 있는 곳에 설치
-팔달산 정상인 서장대 뒤편에 서노대, 창룡문 북쪽 동장대 근처에 동북노대 설치
⑦공심돈(돈후): 돈(망을 본다), 요충지에 독립 설치된 망루 =>남한산성·강화도 해안주변의 돈대
-돈대의 내부를 개조, 내부에서 주변 체크, 공격에 응전할 수 있도록 꾸며진 시설
-돈대의 문제점을 개선+고안된 것이 공심돈, 내부가 빈 설계는 화성이 처음+유일무이
-돌과 벽돌 혼용, 서북공심돈·남공심돈·동북공심돈 등
⑧각루: 높은 구릉에 세운 누각, 감시+휴식(정자=다기능적), 동북각루·서북각루·서남각구·동남각루
⑨치성: 성곽 요소에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10개 설치)
-치(稚)는 꿩의 모습을 의미 =>치성 위는 포루, 돌출부에 세운 누각은 각루, 성문수호 적대
⑩적대: 성문과 옹성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 성문 좌우에 위치(방어)
-북동·북서·남동·남서적대 4개가 있었으나 팔달문 좌우 적대는 시가지화로 소실
⑪포루(砲樓): 성벽 일부를 외부에 돌출시켜 치성과 유사하게 건물 배치
-3층 내부를 공심돈처럼 비워 공격용 화포 설치(동북포루·동포루·북서포루·서포루·남포루)
-임진왜란 후 조선 성제에 대한 반성 제기(성벽에 치성이 없는 것)
-성벽 보강책으로 제기되어 17세기 지방읍성에 설치, 화성의 치성·포루는 성벽 방어 중요 요소
⑫포루(鋪樓): 치 위에 지은 집, 층루로 만들고 하층에 총포혈, 벽돌로 축조
-화성에 설치된 5개소의 포루는 동북포루, 북서포루, 동일포루, 동이포루
⑬봉돈: 불을 비추어 행궁 수비, 파수·정찰·사태를 알리는 군사·교통상의 신호시설물
-서해 바다 홍천대에서 오는 횃불 신호를 받아 용인 석성산 봉화대로 전달(동쪽에 위치)
⑭중포사: 상 밖 비밀통로의 경보를 알리는 구실을 하는 건물, 치위는 포루, 성내는 포사
-성면 담당자가 대포로 경보하면 포사 군사가 기나 대포로 응하는 것을 약속
⑮내포사: 행궁 안 왼쪽 기슭 미로한정 북쪽50보 거리인 화성행궁 뒷담에 설치(소실)
⑯성신사: 화성 성신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 병풍바위 위 동향 건물
【4】 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화성성역의 궤』
1. 조선시대 국가행사 보고서 의궤: 행사가 있을 때 도감(임시기구)을 설치+행사 관리·운영
①행사 후 행사기간 논의내용+공문서+지출비용·물력·참여인원·보고서작성 과정을 정리한 책
-의궤는 다음 행사 때 참고(왕에게 보이는 어람용, 해당기관·사고에 보관하는 분상용)
-손으로 베껴써서 만든 것이라 각 본마다 글씨체나 내용이 다르기도 하다.
②현재 남아있는 의궤 중 가장 빠른 것은 선조의 비인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
-이전 의궤들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 임진왜란 이후 제작된 의궤 중 국외로 반출
-파리 미테랑 도서관 소장 외규장각 297책과 일본 궁내부 기증 서릉각 소장 44종86책
➂국외 반출된 의궤는 환수·대여하여 국내에서 연구 진행 중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546종 2940책), 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287종 490책)
-남은 의궤는 2007년 8차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2. 『화성성역의 궤』를 통한 화성의 복원과 세계문화유산 등재
①화성공역의 전말을 기록한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는 10권 9책으로 구성
-화성공역이 끝난 1796년 9월~11월 마무리, 활자로 간행(1801, 순조1)
-『원행을묘정리의궤』은 정조+헌륭원+혜경궁 홍씨 환갑연 기록, 『화성성역의궤』와 같이 간행
②성곽설계과정, 건물형태, 규격특징, 자재운반기구의 도설, 감독관에서 말단 장인명단,
-판공서간의 공문 등 화성공사 전반에 관해 자세히 기록
-화성 그 자체로 중요하게 평가, 건물의 내외부를 그린 도설 때문에 사람들 주목
➂전쟁 대비를 위해 건설되는 성곽, 무기 사용에 따라 성곽의 축조방식 결정
-수원화성은 조선 후기 건설된 성곽(가장 최신 시설), 건설 후 첫 전쟁은 한국전쟁(1950)
-포탄과 총알로 멸실, 정교하게 작성된 보고서를 바탕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
➃수원화성 성곽은 1997년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본래의 모습이 얼마나 진실 되게 유지·관리 되었는가 평가기준(진정성)
-훼손되었다 복원되었지만 공역기록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진실성 확인
【5】 화성건설과정의 근대적 모습: 화성은 철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
①화성은 읍성과 산성을 단일화 한 성체, 새로운 방어시설을 갖춘 획기적인 곳
-사도세자 무덤을 조성하기 위해 살고 있던 백성을 새로운 읍치로 이주시킨 것
-성내의 경제 부흥+성곽 건설의 과정은 현대 신도시 건설과정과 흡사(정조=근대)
②성곽이 불규칙하더라고 백성의 주거지를 제외시키지 않고 포함하여 건설(현실적 배려)
▶화성이 지닌 도시적·성과사적 의미 =>읍성이면서 산성, 조선의 마지막 성 ①신도시 건설과 경제적 부흥정책은 백성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사고 ②신도시의 입지 =>배산임수 조건, 도로 노선에 맞추어 도시의 좌향 결정, 전통적 틀이 깨짐 ➂전통적 읍성제도 유지, 새로운 방어시설 보유(공심돈·포루·노대), 읍성과 방어성 기능 겸비 ➃지형의 굴곡에 따라 산지대에는 산성, 평지에서는 읍성을 쌓아 도시가 수용되도록 계획 ⑤돌과 벽돌을 번갈아 사용, 돌로만 축조하던 성곽 건축기술 업그레이드, 새로운 건축미 형성 |
-전통적 틀을 깨더라도 백성들(안전+경제적 손실)을 위하겠다는 근대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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