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도시와 건축

교양, 도시공학, 건축, 방통대 등 세계의 도시와 건축 요약정리 4. 도쿄의 역사와 문화

롤라❤️ 2022. 8. 2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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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도쿄의 역사와 문화

-수도 도쿄: 런던·뉴욕과 더불어 세계경제와 금융의 도시, 한국과 근접(김포-하네다 노선 개통)

서쪽(간토지대+다마지역) 높은 지대는 야마노테에는 사무라이 거주

동아시아의 다른 수도들과 다른 점
베이징(중국) ·서울(한국) 도쿄(에도)
베이징(12세기=), 서울(14세기 말 =조선) 16세기 말~17세기, 신도시인 셈
유교적 이념+풍수상상, 왕궁()+종묘·사직단 유교·풍수와는 인연이 먼 도시, 쇼군 거주
사대부·양반이 지배 지배(군인=사무라이), 조닌(상인=경제·문화·소비)
전국에 지방관을 파견하는 정치 반란 방지=다이묘와 처자들이 에도에 기거
항구도시는 지역에 분포 항구도시(에도만), 군사적 전략지, 교통 편리 중시
-19세기 미국의 함대가 침입(1853)

동쪽 저지대 시타마치에는 조닌(상인) 거주 작은 강들이 주변 현과의 경계 형성

1전근대 세계 최대도시, 에도

1-1에도의 탄생: 일본의 역사는 서부를 중심으로 전개

1. 서부 규수·교토·오사카·나라 등 간사이 지역이 일본 건국신화의 무대(고대정권)

-일본의 역사는 중국 남부 지역, 한반도의 강한 영향을 받으며 발전

-12세기 말 가마쿠라바쿠후가 동부 에도에 정권 수립(최초 사무라이 정권+경제력+인구)

-무로마치 바쿠후->도쿠가와 이에야스->메이지유신 정권(에도=>도쿄로 바꾸고 수도로 결정)

2. 아즈마카가미문헌에 에도 등장(장수 에도타로주초, 지명에 자신의 이름 사용)

무로마치 시대 오타 도칸이 에도성 축성(1456-1457) 후부터 농산물·무기·약품 등 거래 시작

에도(강의 입구)라는 이름의 유래=히비야 공원 지역까지 바닷물이 유입(바닷물이 차 있는 만)

-도쿠가와 이에야스(1590.8.1.) 이주 =>에도 성 개축, 조카마치 건설(에도 탄생의 날로 기념)

3.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서부 일본의 다이묘 동원하여 조선 침략(임진왜란, 1592)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참전에 불응, 한양함락+명나라 참전+국제전으로 비화+일본군 패배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해군이 일본 해군 압도, 히데요시 사망(1598)+일본군 철수

히데요시파와 도쿠가와 이에야스파로 분열+대립+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 승리

-사무라이 최고직인 쇼군에 등극(1603), 에도에 바쿠후 설치, 에도를 수도로 결정

1-2대도시 에도의 성장과 구조 -전철 야마노테선(옛 사무라이 거주 지역 순환)

1. 에도 서쪽 대지(사무라이=야마노테), 동남쪽 낮은 습지대+하천(조닌=시타마치)

병농분리라는 사회구조와 제도에 의하여 신분별로 사는 지역 규정

-사무라이의 기원(농촌 지주 출신, 토지 보호 목적으로 무장), 전국시대 이전까지 농촌 거주

전국시대에 다이묘들이 영지 중앙에 성 건축, 농촌의 사무라이들을 집주, 가신으로 속박

-이주 목적은 유사시 신속하게 출동, 농민과 연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

-병농 분리 원칙에 의거하여 농민들의 무기 소유 금지

사무라이가 농촌·토지에서 분리, 조카마치에 집단적 거주 =>도시민으로 전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정권기에 정착, 에도는 도쿠가와씨의 조카마치(천하제일)

2. 산킨코타이 제도에 의해 다이묘와 가족+수행 가신단도 에도에 거주

지방의 영주세력() 통제+반란 방지를 위해 일정기간 에도에 기거(후계자는 영원이 거주)

-전국 각지의 다이묘와 가신단들이 정착하여 사무라이들의 도시로 전환(에도 인구 50% 차지)

사무라이는 소비인구로서 생활필수품·사치품 등을 공급할 유통조직이 필요한 상태

-조닌 세력이 에도에 존재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

3. 도쿠가와가 정권을 잡은 사무라이 시대에 상업 급 발전 =>조닌 세력 성장(전국적 유통망+)

에도+오사카와는 양대 상업도시로 거상과 영세상인들 공존 => 에도의 경제 지탱

-부를 축적하고 사무라이에 영향력 행사, 조닌문화가 사무라이 문화 능가(가부키+마쓰리 등)

이에야스가 북부 구릉(고지마치·간다)+동남쪽(히라가와 하류+해안저지대) 택지화

-조닌마치 형성, 조닌 거주지를 시타마치(아랫동네)라고 명명

바쿠후가 강가·해안가 매립 =>시가지 조성 =>조닌들의 중심지인 니혼바시·교바시·신바시

-니혼바시는 에도와 외부를 연결하는 각 도로의 기점으로 작용(조닌의 비중 강화)

-시타마치는 사무라이 거주지보다 인구밀도가 높아 대형화재·지진발생 피해 발생

사무라이 거주지는 로주·오메쓰케·와카도시요리·메쓰케 관할

-조닌 지역(마치부교->마치도시요리(자치)로 다루야·나라야·기타무라야 3대 가문이 관할

-3대 가문이 경제적 실력을 배경으로 행정·치안·납세 관장=>강력한 권한 행사

-지가리(토지대여+건물건축+장사+거주), 다나가리(토지+주택이나 점포 대여로 생활)로 분류

메이레키 대화재 발생(1657.1, 후리소데) =>북부 홍고·유시마·간다·니혼바시까지 피해

-불길에 쫒긴 시민들이 강으로 뛰어들어 동사, 에도 시가의 60% 소실+사망자 10만 명

-밀집해 있던 건물을 외곽으로 이주(아사쿠사·쓰키지·고마고메), 혼조·후카가와 개발하여 이주

4. 에도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18세기 후반 100만 명~130만 명)

-에도와 함께 일본의 3대 도시인 오사카 38만 명, 교토 34만 명 =>런던·파리는 35만 명 전후

-병농분리 정책으로 가장 인구가 많은 신분은 사무라이(70만 명)

-조닌 인구는 1693(353588), 1843(587458), 종교인+천민 인구는 4~5만 명

-산킨코타이 제도로 일시적 거주자를 제외하면 바쿠후 가신단과 조닌들이 다수 거주

5. 에도의 거대한 소비인구를 지탱하기 위한 광범위한 유통 시스템 발달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간사이 지역=교토·오사카=가미가타), 고급품 제작(상업 기반 형성)

-모든 물건은 나온다는 의미의 천하의 부엌이라고 불리는 오사카가 유통의 중심지

에도는 구다라나이모노(저질품=구다라나이=쓸모없다·재미없다), 인구증가로 경제력 증대

-에도에서 필요한 목재·비단·땔감·종이·미소(된장간장 등 상품작물 재배지역으로 전환

-니시다마(신탄·목재·생사 공급), 가사이(야채·쌀 공급+퇴비)

도쿠가와 시대 중기 이후 직접 에도로 수입하는 생산·유통시스템 정착 =>지마와리 경제

-17세기 말 겐로쿠 문화(조닌문화=가미가타문화 모방), 19세기 초 가세이 문화(에도 독자적)

-상수원은 간다가와와 다마가와(1654) =>개량수도 설치하기 전까지 상수원으로 작용(1899)

2도쿄의 탄생과 성장: 19세기 서양 선박들이 일본 근해(훗카이도, 나가사키)에 출몰

2-1에도에서 도쿄로: 미국 증기선 흑선 에도만에 짐입(1853, 태평양함대 사령관 페리)

국교 요청(페리내항+일본 개국) =>바쿠후가 시나가와에 포대 설치(12)

-안세이 대지진 발생(1855), 외교정책 실패로 바쿠후 폐지되고 왕정복고(1858)

바쿠후 사령관과 휴전 합의한 관군(천황의 군대)이 에도로 무혈입성(1868.5), 에도진대부 설치

-에도 시민의 반발 최소화(바쿠후 행정 책임자 이용+치안과 행정업무 유지)

-재판소 설치 후 에도 시와 주변 지구의 행정을 포괄하는 도쿄부 출범=>도쿄로 개명

2-2제국의 수도, 도쿄: 메이지 정부가 수도 결정 고심하다 에도로 천도

-교토는 헤이안시대 이래 천황이 거주하고 있는 곳(왕정복고의 명분에 적합)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 전국 상업의 중심지, 서양+동아시아와 가까운 항구도시로 수도에 적합

1. 에도는 250년간 일본의 수도, 경제·문화의 중심지 =>히소카가 에도 천도의 중요성 강조

제국의 수도는 제국의 중앙에 위치, 훗가이도 개척에 필요

서양식 대함의 시대+수운의 장래성 고려+바쿠후가 설치한 요코스 조선소 존재 가치 강조

오사카는 교외지 확대+차마·군대 등의 왕래에 비적합, 신정부의 공공시설 신축에 에도가 적합

-천황은 에도 성에 기거, 다이묘의 번저를 신정부 관공서와 공공시설로 이용

오사카는 상업도시로 성장 조건 충분, 에도는 수도로 결정되지 못하면 몰락

-에도를 도쿄로 한다고 조서 반포(1868), 천황이 쇼군의성인 에도 성에 거주(태정관 이전)

2. 메이지 정부가 서양화 정책 추진+산업혁명 주도 =>대규모 관영공장 건설(인쇄국·포병공장)

도쿄의 풍경을 서양식으로 교체 =>가스등(1874)+전등(1882)+대표적 건물을 서양풍으로 건축

-쓰키지는 서양외교단과 상인들 거주(유럽화), 철도개통(1872, 신바시-요코하마=53분 만에 이동)

-서양식 신문 발행(1877, 57), 긴자는 저절리즘 거리로 변화(신문사 증가)

도시 인프라 구축, 에도시대 마치들 통폐합->새로운 행정구역으로 재편

-도로망(자동차시대 대비 확충), 수도관 개량(1898, 철관으로 교체)=>상수도 공급상황 개선

-서양풍 건축 증가, 유럽풍 히비야 공원축조(1903, 시민들의 휴식처+정치집회 장소로 활용)

3. 진도 7.9의 강진 발생(1923), 내각 교체시기+사태수습 미비+피해 발생 =>야마모토내각 출범

대규모 피해로 9.2 계엄령 선포+도쿄 봉쇄=>혼란·공포·허위정보로 조선인 습격+살해

-황태자의 결혼으로 조선인 관련자들 사면, 군중의 광기에 면죄부 실행(1924)

지진으로 대량참사+전국 부의 8/1손실, 수도 천도론 제기될 정도

-도쿄 시장 고토 신페이가 제도 재건을 기치로 도시개조계획 발표, 도쿄 부흥의지 표명-성공

4. 도쿄 범위 확대+경제 성장으로 인구 급증, 러일+1차 대전을 거치면서 가속화

도심보다 교회 지역의 인구 급증 =>도심으로 출근하는 생활 패턴 정착을 의미

-1930년 초 500만 명~800만 명으로 증가하여 뉴욕이 이어 두 번째로 인구 많은 도시로 인식

고부철도 개통으로 다마 지역과 연결 =>에도로 생사 유입, 다마군 지역 주민 도쿄로 편입

-면적상 세계 5위 도시로 선정, 도서 지역까지 도쿄에 편입(이즈 제도+오가사와라 제도)

-도서 지역은 군사전략적으로 중요, 육해군 요새 설치(미군과 전투, 1944)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1952) 체결, 미군정 폐지, 1968년 일본에 반환(오가사와라 제도)

-태평양전쟁으로서부 다마지역을 피난지·군수생산·시설 이전지로 주목=>도제 실시(도쿄도, 1942)

-미군 폭격(1945, 도쿄대공습), 대규모 사망자+시가지 면적 반 이상 소실 =>민선시장 선출(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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