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도시와 건축

교양, 도시공학, 건축, 방통대 등 세계의 도시와 건축 요약정리 3. 후기 조선시대의 도시계획, 화성

롤라❤️ 2022. 8. 2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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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후기 조선시대의 도시계획, 화성

1조선시대 산성·읍성의 이원구조와 17세기 읍성활성론의 대두

1. 국토의 70%가 산지지형, 평지성보다 산성 발달, 방어에 유리, +넓은 골짜기 보유

삼국시대 산성은 평양(대성산성), 경주(남산성·선도산성·서형산성), 한강주변(아차산성·이성산성)

고려시대 평상시 읍성 안에 살다가 전쟁 때는 산성으로 피난하는 이원구조 전국적 확산

-우리나라 고유의 성곽제도로 정착, 조선시대까지 연결

2. 산성 발달로 읍성 위축(방어시설 부족), 읍성은 읍치 외곽을 둘러싼 성벽

관아·객사만 읍성에 존재+백성은 성벽 밖 거주(충청도 서산시 해미읍성)

수령·백성 모두 읍성 내 거주(전라도 순천시 낙안읍성)

-전국 대부분의 읍성은 의 방식, 통치시설과 백성들의 거주지가 공존

3. 통치자와 주민의 생활공간을 성벽으로 둘러싸는 것은 중국·서아시아·유럽에서도 발견

중국은 2(3) 성곽+성벽+외곽에 호(적의 접근방지), 일정한 간격의 치성(돌출부, 감시·공격)

조선은 중국과 유사하지만 지형을 고려한 불규칙한 형태+호가 없는 차이점 형성

-산성에 의존하는 전통 때문에 읍성은 방어시설이 부족한 것이 중국과 다른 점

-북쪽은 중국과 국경 접하고 있어 방어시설 준비(갑산부·북청부성=성곽을 네모반듯하게 구성)

4. 조선시대 성제는 읍성과 산성이 세트를 이루는 이원적 구조(임진·병자호란 전후 전환기 형성)

전국 산성수축공역 실시, 읍성의 방어시설 강화 주장(유성룡=치성·옹성·현안·+성벽 설치)

실학자 유형원은 산성보다 읍성을 강화해야한다고 주장(백성의 경제활동 장려+경제활성화)

-전국적 경제발전과 더불어 현실화(황주읍성을 시작으로 전주·대구·동래·해주·청주읍성 개축)

-반계 유형원의 주장이 보다 확연하게 드러난 곳은 18세기 말에 축성된 화성

 

218세기 신도시, 화성의 탄생: 입지 선정부터 경제부흥까지 중앙정부가 계획

-이원적 성제도의 불합리성 비판+경세치용의 사상을 배경으로 건설된 읍성이자 산성

1. 현륭원의 조성과 구읍치의 이전: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 천장하는 일로부터 시작

정조 즉위 13년 서울시립대 배봉산에서 수원으로의 천장 결정(1789.7.11.)

-신분에 따른 무덤 명칭은 능(산릉, ·왕후), (왕세자··후궁), (대군·공주·일반백성)

수원부 관아 뒤쪽 땅으로 결정, 지역에 살고 있는 백성이주가 관건이라 경제적 보상 약속

-읍치 조성후 구읍치에 살던 이들에게 주택 및 토지값과 이사비용 지불, 무덤 명칭은 헌릉원

2. 신읍치의 도시구조: 구읍치에서 신읍치가 자리한 팔달산 아래 고을로 이주

신읍치에는 관아·객사·향교·사직단 헌륭원 전배를 위해 왕이 머물 행궁까지 마련

-수원 신읍의 주산인 팔달산을 배경으로 동향에 배치, 기존 고을과 다른 방식으로 구성

고을은 북쪽 주산을 배경, 도로는 동서를 관통, 관아는 북쪽(남향) 배치가 일반적이었으나

-동향에 관아 배치, 중심부를 한양에서 호남지역을 잇는 도로가 관통, 팔달산은 서쪽

3. 정조대 경제정책과 신읍치의 번성: 삶의 터전을 옮겨 정착하기까지 백성들에게 주목

읍치 번성을 위한 정책 실시, 금난전권 폐지하는 통공정책 논의(1790, 체제공)

-관아·객사·향교·군영시설 건설, 상업진흥책(낮은 금리 대출) 실시로 상업발전 토대 마련

1792년 중심도로변에 입색전(비단), 어물전(생선·과일), 목포전(무명·모시·목화),

-미곡전(·담배·국수), 관곽전(), 지혜전(종이·신발), 유철전(놋쇠와 쇠) 등 설치

-1793년 화성(성인의 축복, 화산이 봉우리보호)이란 이름과 유수부로 승격

4. 정조대 문화정책과 화성공역의 계획: 창덕궁 안에 규장각·봉모당 등 학술적 공간 마련

-봉모당(선대임금의 어필보관), 규장각(고금의 도서 보관), 관료들을 등용하여 연구 지시

-경세치용+실사구시 실학자(중국의 문물과 신문물 경험(정약용과 박제가 등)

-박제가(북학파, 벽돌 활용을 주장, 화성성역공사에 채택)

-정약용(한강 배다리설치, 한강 지형·조선선박제도 정비, 성곽공역 전체계획, 거중기·유형거 고안)

5. 감동당상 조심태의 역할: 수원 읍치 번성, 성곽 건설 계획 =>실학자들의 이론 수용

화성의 설계와 계획은 실학파 학자들이 구상, 현장에서 감독·변경 처리한 사람은 조심태

-공사현장 총괄 감동당상에 비변당상 조심태, 사무 총괄 총리대신은 체제공 임명

수원이 삶의 근거지인 조심태는 주민의견 수렴+인근지역에 대한 정보 습득에 유리

-영우원 천장 결정 후 수원부사로 임명, 주민을 신읍으로 이주시키는 역할 수행

-지리적 이해와 정보 덕분에 화성공역 석재 조달, 숙지산·여기산·권동 일대에서 채취

6. 화성공역의 특징: 성역소 조직(조심태) 후 정조182월 공역 시작(1794)

9월 팔달·장안 대문과 화홍문(복수문) 건립을 위한 터닦기와 하천 물돌림 공사 시작

-북문과 남문의 문루 ->북문의 외성인 북옹성 ->남문의 외성 남옹성 완공

-화성 내로 들어가는 물 감시하는 북수문(화홍문) -> 남수문은 정조 20(1796) 완료

돌로 축조된 석성, 포루·공심돈은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방어시설은 벽돌로 축조

-·벽돌 혼용(북문·남문·서문·동문 등 4대문의 옹성과 공심돈·노대·암문·봉돈·각구·포루)

-여장·문루·옹성·성벽의 현안은 감동당상인 조심대의 변방지역 근무경험을 바탕으로 설치

공정에 참여하는 장인과 모군들에게 품삯 지불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 특징

-17세기 중반 백성들이 의무로 국가공역에 참여하던 부역대신 모군제도 시행

-대납가능+강제 동원이 아니라 일꾼 고용이 관행화되기 시작했기 때문

장인에 대한 강제동원과 부역노동은 18세기 중반까지 유지

-정조대 문희묘(문효세자 사당) 영건공사에서부터 장인들의 기능과 작업 일수에 노임 지급

-화성공역의 특징은 일꾼의 품삯 지급방식과 더불어 재료값 지불 방식

-이유는 석재와 벽돌공급의 효율적인 운반과 관리, 시공의 편의가 목적

 

3화성의 건축물: 지형을 살려 산성과 읍성의 중간적인 모습으로 건설(한 덩어리 성제)

성벽: 주산은 팔달산, 동쪽을 내다보는 형국으로 축조, 화성성역의궤산지·평지로 구분

-돌이 주재료, 방어시설은 벽돌 사용,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평균 5m 내외)

-평지를 경사지보다 높게, 성벽 위 여장+총구멍, 석축은 장대석+마름돌(막돌) 사용

-성벽 하부는 큰 돌+상부는 작은 돌, 위로 올라가면서 중간배가 안으로 들어가는 모양

-바깥쪽만 내탁 방식 사용(경사지처럼 흙을 쌓아올려 인공적으로 내탁 축조)

사대문: 북문(장안문), 남문(팔달문), 동문(청룡문), 서문(화서문)

-서울방향의 장안문과 반대 방향의 팔달문이 화성을 대표하는 성문, 서울성문보다 크게 축조

-도성보다 작지만 각종 시설은 도성보다 월등히 강화(웅성=큰 규모와 격식 갖추어 조성)

암문: 적이 알지 못하도록 출입구를 내어 사람·가축 통과, 군수품 조달하기 위해 설치

-북암문·동안문·서암문·서남암문·남암문 등 5개 설치, 지형조건에 맞추어 다른 형상

수문: 광교산 발원->화성 내 관통하는 유천이 유입되고 나가는 곳에 북수문·남수문 설치

-광교산 발원->수원천+영화천을 따라 연못 조성(용연·남지·북지·동지) =>방화수류정

장대: 군사를 지휘+성 안팎을 관망하는 곳, 팔달산 꼭대기(서장대, 관망), 동장대(연병장)

노대: 장대 옆에 설치, 성 밖의 동향+군사명령에 따라 특정한 색깔의 깃발로 신호

-방아쇠를 당겨 활을 쏘는 쇠뇌 사용(노수), 장수가 신호를 확인할 수 있는 곳에 설치

-팔달산 정상인 서장대 뒤편에 서노대, 창룡문 북쪽 동장대 근처에 동북노대 설치

공심돈(돈후): (망을 본다), 요충지에 독립 설치된 망루 =>남한산성·강화도 해안주변의 돈대

-돈대의 내부를 개조, 내부에서 주변 체크, 공격에 응전할 수 있도록 꾸며진 시설

-돈대의 문제점을 개선+고안된 것이 공심돈, 내부가 빈 설계는 화성이 처음+유일무이

-돌과 벽돌 혼용, 서북공심돈·남공심돈·동북공심돈 등

각루: 높은 구릉에 세운 누각, 감시+휴식(정자=다기능적), 동북각루·서북각루·서남각구·동남각루

치성: 성곽 요소에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10개 설치)

-()는 꿩의 모습을 의미 =>치성 위는 포루, 돌출부에 세운 누각은 각루, 성문수호 적대

적대: 성문과 옹성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 성문 좌우에 위치(방어)

-북동·북서·남동·남서적대 4개가 있었으나 팔달문 좌우 적대는 시가지화로 소실

포루(砲樓): 성벽 일부를 외부에 돌출시켜 치성과 유사하게 건물 배치

-3층 내부를 공심돈처럼 비워 공격용 화포 설치(동북포루·동포루·북서포루·서포루·남포루)

-임진왜란 후 조선 성제에 대한 반성 제기(성벽에 치성이 없는 것)

-성벽 보강책으로 제기되어 17세기 지방읍성에 설치, 화성의 치성·포루는 성벽 방어 중요 요소

포루(鋪樓): 치 위에 지은 집, 층루로 만들고 하층에 총포혈, 벽돌로 축조

-화성에 설치된 5개소의 포루는 동북포루, 북서포루, 동일포루, 동이포루

봉돈: 불을 비추어 행궁 수비, 파수·정찰·사태를 알리는 군사·교통상의 신호시설물

-서해 바다 홍천대에서 오는 횃불 신호를 받아 용인 석성산 봉화대로 전달(동쪽에 위치)

중포사: 상 밖 비밀통로의 경보를 알리는 구실을 하는 건물, 치위는 포루, 성내는 포사

-성면 담당자가 대포로 경보하면 포사 군사가 기나 대포로 응하는 것을 약속

내포사: 행궁 안 왼쪽 기슭 미로한정 북쪽50보 거리인 화성행궁 뒷담에 설치(소실)

성신사: 화성 성신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 병풍바위 위 동향 건물

 

4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화성성역의 궤

1. 조선시대 국가행사 보고서 의궤: 행사가 있을 때 도감(임시기구)을 설치+행사 관리·운영

행사 후 행사기간 논의내용+공문서+지출비용·물력·참여인원·보고서작성 과정을 정리한 책

-의궤는 다음 행사 때 참고(왕에게 보이는 어람용, 해당기관·사고에 보관하는 분상용)

-손으로 베껴써서 만든 것이라 각 본마다 글씨체나 내용이 다르기도 하다.

현재 남아있는 의궤 중 가장 빠른 것은 선조의 비인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

-이전 의궤들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 임진왜란 이후 제작된 의궤 중 국외로 반출

-파리 미테랑 도서관 소장 외규장각 297책과 일본 궁내부 기증 서릉각 소장 4486

국외 반출된 의궤는 환수·대여하여 국내에서 연구 진행 중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5462940), 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287490)

-남은 의궤는 20078차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2. 화성성역의 궤를 통한 화성의 복원과 세계문화유산 등재

화성공역의 전말을 기록한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109책으로 구성

-화성공역이 끝난 17969~11월 마무리, 활자로 간행(1801, 순조1)

-원행을묘정리의궤은 정조+헌륭원+혜경궁 홍씨 환갑연 기록, 화성성역의궤와 같이 간행

성곽설계과정, 건물형태, 규격특징, 자재운반기구의 도설, 감독관에서 말단 장인명단,

-판공서간의 공문 등 화성공사 전반에 관해 자세히 기록

-화성 그 자체로 중요하게 평가, 건물의 내외부를 그린 도설 때문에 사람들 주목

전쟁 대비를 위해 건설되는 성곽, 무기 사용에 따라 성곽의 축조방식 결정

-수원화성은 조선 후기 건설된 성곽(가장 최신 시설), 건설 후 첫 전쟁은 한국전쟁(1950)

-포탄과 총알로 멸실, 정교하게 작성된 보고서를 바탕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

수원화성 성곽은 1997년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본래의 모습이 얼마나 진실 되게 유지·관리 되었는가 평가기준(진정성)

-훼손되었다 복원되었지만 공역기록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진실성 확인

 

5화성건설과정의 근대적 모습: 화성은 철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

화성은 읍성과 산성을 단일화 한 성체, 새로운 방어시설을 갖춘 획기적인 곳

-사도세자 무덤을 조성하기 위해 살고 있던 백성을 새로운 읍치로 이주시킨 것

-성내의 경제 부흥+성곽 건설의 과정은 현대 신도시 건설과정과 흡사(정조=근대)

성곽이 불규칙하더라고 백성의 주거지를 제외시키지 않고 포함하여 건설(현실적 배려)

화성이 지닌 도시적·성과사적 의미 =>읍성이면서 산성, 조선의 마지막 성
신도시 건설과 경제적 부흥정책은 백성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사고
신도시의 입지 =>배산임수 조건, 도로 노선에 맞추어 도시의 좌향 결정, 전통적 틀이 깨짐
전통적 읍성제도 유지, 새로운 방어시설 보유(공심돈·포루·노대), 읍성과 방어성 기능 겸비
지형의 굴곡에 따라 산지대에는 산성, 평지에서는 읍성을 쌓아 도시가 수용되도록 계획
돌과 벽돌을 번갈아 사용, 돌로만 축조하던 성곽 건축기술 업그레이드, 새로운 건축미 형성

-전통적 틀을 깨더라도 백성들(안전+경제적 손실)을 위하겠다는 근대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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