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도시와 건축

교양, 도시공학, 건축, 방통대 등 세계의 도시와 건축 요약정리 1. 서울, 중세도시에서 근대도시로

롤라❤️ 2022. 8. 28.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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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서울, 중세도시에서 근대도시로

1중세도시 서울의 원형: 유교적 가치와 풍수적 공간관이 서울의 원형을 규정

-서울은 한국사회 발전과정과 파생 된 문제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의 거울·시대아이콘

-서울의 근대화(현대화)는 중세적 원형을 변화+깨뜨리면서 진행

-영역 확대, 인위적 격자형 도로망,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건조물

 

1-1한양 전도: 천도와 새 수도 건설(역성혁명의 정당성 입증, 가시적 표현)

1. 새 수도에 수기치인의 논리+중국 중심의 화이론적 세계질서 이념 표현

신라말엽 지리도참설·풍수지리설 유행, 고려조에는 종교와 같은 힘 발휘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천혜의 수상 교통로인 한강이 부각되면서 한양천도론 형성

한양을 남경으로 승격(고려 문종, 통일왕조의 정치적 입장 개입+삼국의 역사 포용)

-옛 고구려의 도읍(서경=평양), 신라의 도읍(동경=경주), 백제의 도읍(별경) 설치

-숙종 대 김위제가 도선기』『삼각산명당기를 근거로 남경천도론 제기=>남경개창도감 설치

공민왕이 천도론 제기(고려 말, 정당성 입증 근거=지리도참설 활용=개경 지기 쇠약)

-남경은 200년 이상 방치된 도시로 대규모 토목공사 필요, 정세불안으로 중지

우왕 대 한양 천도 급 결행, 종묘·사직 국가 중요시설 이전 미비로 5개월 만에 환도

-공양왕이 재차 한양천도 결행(개경은 인군을 폐축 하는 땅), 호환+우환 빈발로 다시 환도

-고려 말 2회의 천도 시도 실패는 중세적 사고+특권적 구조물인 귀족사회 반발 때문

2. 천도를 위해서는 정치·사회 지형의 전반적 변화가 필수 전제 =>새 왕조의 개창으로 실현

-이성계가 도읍 변경 주장, 왕조의 성쇠를 왕도의 지기와 연결(지리도참적 사고)

-도읍지 결정의 최종적 판단의 준거로 작용한 것은 한강, 한강은 천혜의 방어선이자 교통로

-경북궁 뒤편 일대로 결정(1394, 태조3), 동년 9월 신도궁궐조성도감 설치(본격적 도성 조영)

 

1-2서울의 조영: 공간 원형은 풍수지리설과 유교적 이상도시론의 조화

1. 입지는 풍수지리설, 내부 공간 설계는 유교적 원칙을 담은 주례』「고공기활용

마크 새비지(도시공간은 권력이 흔적을 남긴 사회갈등과 정치과정의 물리적 고증물)

-서울 도시공간의 원형은 조화와 공존의 산물이 아니라 대립과 갈등의 결과물로 평가

왕도 시설은 궁궐을 중심으로 전조후시 좌묘우사로 배치(주례』「고공기원칙)

-조정(관아)은 궁궐의 전면에 포진(왕 관할), 시장은 궁궐 뒤에 잡아 후가 관장

-태묘(종묘=궁궐 왼쪽), 사직(오른쪽), 궁성 문의 수·도로의 폭원은 왕도의 위계에 따라 규정

2. 한양 자연공간은 제후국 왕도의 격식(주례)을 갖출 수 없는 대지 =>위치 왜곡 발생

내사산(백악·인왕·낙타·목멱)으로 둘러싸인 분지+하천 =>자연 지형에 따라 시설 위치 조정

-주산(백악+북좌남향), 백악 아래가 아닌 분지 서북쪽 궁궐 기지 조성(시전 배치 공간 부족이 원인)

종묘 자리를 응봉이 차지하고 있어 경북궁의 정동 아래쪽에 종묘 설치(불가피한 변형)

-문묘 건설 후 도평의사사 등 관아의 기지를 궁궐 전면 좌우에 마련(육조에 분배=육조거리)

성곽 공사(도성 규모 결정)는 도성축조도감 설치를 계기로 시작(태조 4, 정도전 주도)

-높은 산지는 석성, 평지와 평산은 토성, 도성 8대문과 월단·문루 건축=>1398년 일단락(태조7)

-도로망 정비+행정구역 552방으로 구획, 서대문<->동대문 사이 종루 설치(종로)

3. 1차 왕자의 난 발생으로 도성 영건 공사 중단, 개경환도 결정(정도전의 조영 사업 좌절)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태종 5), 중단되었던 도성 조영사업 재개(태종이 지휘)

-태종은 정도전(신료 중심)과 반대로 왕권 중심의 국가로 구축(주례변경)

-정도전이 설계한 경복궁을 사용하지 않고 응봉 아래, 종묘 북쪽에 새 궁궐 창건(창덕궁)

경복궁은 궁역(사적 공간)과 궐역(정무처리+공적 공간)이 구분된 궁궐(중앙의 축선이 경계선)

-가장 큰 건물 수정전, 합동 연회장 경회루 등 격식에 충실+신권을 배려한 궁궐

태종의 창덕궁은 궁궐의 입지에서부터 좌묘우사의 원칙 위배(종묘 북쪽)

-궁궐 내부 조영도 궁역과 궐역 구분 없이 궐내 각사는 왕의 전각에 종속되는 형태로 배치

-왕의 후원 조성, 신하들을 위한 공간을 배려하지 않은 결과(신하는 왕의 종복 표현)

-경복궁 신무문 뒤에 형성되었던 시장 폐지, 물종별 장시 지정(1410) =>전조후시의 원칙 폐기

5. 도성 내 중심 가로 좌우에 행랑 건설(1412, 행랑조성도감), 종루(광통교 북쪽, 보신각) 이전

종로 좌우, 돈화문-정선방 동구, 경복궁 남쪽-종묘 앞, 종루-남대문, 종묘 앞-동대문

-설치된 대규모의 행랑은 대부분 시전 점포로 사용, 일부는 관아 건물로 이용

행랑 건설로 새 도읍지 기반시설 정비 완결(중심대로의 폭 확정, 도심부의 인공 경관 정비)

-행랑은 도성 내부를 가시적으로 구획하는 구조물, 남북 지역은 주택가 형성

6. 태조대의 조영공사와 태종대의 추가적 조영공사는 서로 다른 정치적·사상적 맥락에서 형성

도시 공간에 태종 이방원으로 상징되는 군권과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신권의 길항·대립 표현

-공통점은 숭유억불, 종교시설은 도성 내 배치 금지(불교사찰), 도성민을 위한 장소도 금지

왕과 관련된 시설들만 설치, 서울은 왕도, 왕의 권위만이 유일한 권위로 인정받는 도시

-공적 시설이 밀집한 도성의 북부(궁궐·관아·시전)는 상위 공간, 남쪽은 하위 공간으로 인지

 

1-3조선 후기 서울 경관의 변화: 인구증가로 주거 시설 확장이 경관변화의 주원인

1. 목재가 주재료(화재에 취약+소방체제 마련 =>방화장+소개지)

16세기 말~17세기 초 임진왜란 시 방화로 건조물 파괴(경복궁 전소+창덕궁+종묘)

-전란 후 도성 재건(창덕궁·종묘·경덕궁=경희궁 건축), 종루는 종각으로 재건(격식·규모 축소)

-경복궁은 입지가 불길하다는 인식으로 대원군 때까지 폐허, 창경궁·인경궁 등 궁궐 비중 증가

전란 이후 병영·창고 등 도성 외곽·성 밖·한강변에 군사적 시설들 증가, 도성 내 변화

-숙종 대부터 외침이나 내란대비 관방시설(북한산성·남한산성·탕춘대성·서울성곽) 수축 활성화

-영조 대 도성민 생활 안정을 위한 대규모의 준천 사업 추진, 정조대 화성 건설 공역 진행

2. 양란 이후 사적 건조물(민가)이 도성 내 경관 변화에 결정적 구실로 작용 =>인구 증가

인구 10만 수용 규모로 설계된 도시, 17~18세기에 두 배 이상의 인구가 서울로 집중

-군제개편(상비군 병력·식솔), 전란복구(대규모 노동력 필요), 급가모립(대리역 행위) 일반화

-농업생산력 상승(기술개발+시비법+수리사업)으로 농촌의 유휴 노동력 서울로 이주

도성 주변과 경강 일대에 새로운 상업거점 형성·발전도 인구 증가 배경으로 작용

-경강변과 도성 주변이 도시의 일상 생활권으로 전환 =>서울의 공간적 경계 확장

-18세기 서울 강북 지역 전체가 한성부 행정 관할지역으로 편입

경강변의 용산·마포·서강·송파·양화진이 상업 거점으로 부각 =>상업 사용인의 주거 시설 증가

-신축된 성곽(북한산성·탕춘대성)과 병영·관창 주변 지역이 주거지 및 근교 농업지역으로 변모

3. 도성 내 거주 공간의 구조·경관 변화 본격화(17세기, 인구20, 주택문제 부각)

-여가탈입(권세로 주택 탈취), 공한지+개천변을 집터로 활용, 사회적·계층적 분리 경향 심화

-조선 초기 일반적 필지구조는 양반관료 점거한 대형필지 중심으로 시민들의 택지 조성

-조선 중엽 이후는 정치·사회적 변동으로 지위·신분·당파별로 분리 =>당파끼리 모여 거주

4. 19세기 오촌·양대·자내·오강으로 주거 공간 구분, 공간분할에 권력관계 반영

오촌: (낙산언저리(인왕산 밑 서소문 주변(남산기슭(백악아래의 다섯 촌

-궁궐 가까운 북촌(노론), 토질 나쁜 남촌(무반과 남인), 동촌과 서촌에는 소론과 북인

-중인·서얼은 광교->효경교 개천변 양안 일대에 중촌에 집거

양대: 윗대·아랫대로 경복궁 주변 육조 일대 상촌(윗대)에는 궁궐붙이들 거주

-하급 무관과 직업군인들은 개천 하류 부근 오간수문과 광희문 주변 아랫대에 거주

오강은 경강변 주거지역으로 경강 상업 관련 상인과 상업사용인들이 거주

자내는 성 밖의 거주지(도성보수·경비 담당기관·지역 배정+천자문 순서대로 붙인 이름)

-근교 농업에 종사, 도성 민들에게 채소 등 공급하는 영세상인들 거주

5. 도시 외곽 자내와 오강 일대에서 도시 공간의 근대적 변화 전개(사회질서·경제체제 확산)

-새벽시장인 대규모 조시 형성 =>이현(동대문 광장시장 일대), 칠패(서울역 봉래동 일대)

-자내는 근교 농업 지대로 특화, 오강은 신흥 상업지구로 발전

 

2황도의 꿈, 식민도시의 상징

2-1대한제국기의 도시 개조: 개항 이전 경제적·실용적 관점에서 도시 가로망 개선 주장

1. 중국 도로 체계에서 시작된 도로 개수론이 개항 이후 일본과 서구의 영향으로 확산

-김옥균이 치도규칙 작성(1882, 일본 조사시찰단), 박영효가 치도국 설치하여 도로 정비 착수

-경제적 관점의 치도+유럽·미국·일본의 도로체계 정보 수집, 재정적 문제로 치도사업 중단

2. 갑오개혁 이후 국가가 도로 개수사업 진행(1895, 가가금령=도로 주변 가옥 건축금지)

도로수치+가가기지 관허 결정(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 한성 내 도로 폭원을 규정 승계

-내부령 9호는 대한제국기 서울 개조사업 신호탄, 종로·남대문 가가 철거(관허된 것은 제외)

경운궁으로 환궁 이후 경운궁 중심의 환상방선형 도로망 개착 시작(1897, 고종)

-시각 종점에 원구단·독립문·기념비전 등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 건조물 착공

도로 개설 후 전차 부설(1898), 종로-남대문 증설(1899), 종로의 중심성 강화

-시민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시전가는 서울의 중심 간선도로(경운궁·경희궁 사이 관통)로 변화

-경운궁 뒤편 경인철도 경성정거장 건립, 마포를 시발점으로 하는 서북철도 공사 개시(1902)

-경강변 상업 근거지와 도성 안을 철도로 연결 =>철도 중심의 전국적 교통망 정비

3. 도로 개수·개착 후 황궁 정비(1896, 경운궁 수리->선원전·함녕전·보문각)

-1898년 궁궐 주변 외국인 가옥 매입, 수옥헌·중명전·정관헌 등 양관 신축

-궁궐처럼 사용할 경희궁 수리 후 홍교건설(1901), 경운궁·경희궁을 연결한 최초의 대형 육교

4. 대한제국기 도시 개조사업은 근대국가의 수도 이미지+황권+독립국가의 정치적 표현

시민의 고충을 직접 듣는 공시인순막 자리에 근대적 도시공원인 탑골공원 건설

-황도의 중심 대로변에 공원 조성 =>민의의 공간+제왕의 길 간 상시적 연계점 형성

-공원 공사 착수 직후 만민공동회 개최, 시민의 공간으로 기능하던 곳

도성 삼대시장은 조시(이현, 칠패)와 낮 시간 대 상품 거래(종로 좌우 가가)

-종로 철거 후 상거래 장소를 선혜청 창고 자리로 이전(최초 상설시장-현 남대문시장 원형)

-도시중앙시장은 상설시장의 모범으로 작용 ==>1905년 이현에 광장시장 개설

-상설시장은 도시 내 소비시장 확대·도시미관 개선·민의 소통 공간 확장 역할 수행

5. 도시공간에 절대주의적 국가관 표현, 황권 절대화 방향의 특징=>내재적 발전과정

-환상방사선형 도로, 황권의 존엄성과 국가의 자주성 상징 건물+기념 조형물 설치

-종로의 공원조성, 도시 중앙시장 신설 등 황제와 민 사이, 민 상호 간 소통중시

-종로(중심가로 위상 부여)->마포(경강변 상업거점+경과점)->개성·평양·의주와 연계 도모

2-2일제 초기 경성 도시 개조사업

1. 서울로 진입한 외국 세력이 권위와 영향력 강조를 위한 가시적 구조물 축조

고딕 양식의 교회(천주교+미국 기독교교회), 각국 공사관과 일본이 성 내 건축물 건립

-1880년 일본 공사관 설치 후 일본인 거주 시작, 조영통상조약 체결(1885) 이후 본격화

외국인 잡거를 우려한 정부가 각국 공사들과 협의하여 국가별 거류구역 제한

-경운궁 주변 정동(유럽·미국인), 수표교 남쪽-종현(을지로-명동성당, 청국), 일본(남산기슭)

일본공사관 주변 남산 기슭에 일본 집단 거류지 형성(이현=진고개)

-중심상권인 종로 진출 희망, 청일전쟁 후 청국 후퇴로 확보

-이현<->남대문 길 개수+교차점을 근거지로 확보(영사관·거류민총대역장·상업회의소 이전·신축)

2. 러일전쟁(1904) 후 일본인 이주 증가+거류지 확대(남촌 일대를 집거지로 장악, 혼마치=본정)

본정6정목~9정목(충무로1~5), 남대문+을지로~광희문+육조거리~남대문(태평로) 개수공사

-일제가 경성도로 개수사업 추진(1912), 기본계획안(시구개정예정노선+시가지건축물취체규칙)

1918년까지 남촌 내부+도심을 연결하는 도로 개수 =>일본인 거주지 중심으로 재편

-시구개정 예정노선은 격자형의 직선도로망, 기존 상징적 건조물(종묘·경희궁·덕수궁) 절단

-황토현 광장(광화문 네거리)과 황금정 광장(을지로 입구) 중심 환상방사선형 도로망 구성

광화문·서울역 간 직선상징축은 효과적 병력 이동선(중심가로의 노폭 확장과 직선화)

-주차군 사령부(용산), 60연대(대한문 앞), 헌병대(광화문 앞) 등 군부대로 연결

-파리코뮌(1871) 이후 만들어진 파리 시가지계획의 핵심 내용+근대 도시계획 답습

-경성 시내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한 도로망 계획(진압을 위한 공간적 편제)

3. 3.1운동 이후 기존 도로에 부분적인 수정을 가하여 축소 시행

-광화문 중심의 두 개의 방사상 도로 신설, 도성 밖으로 통하는 도로 확장

-광화문·남대문·용산을 잇는 도로 건설(상징성을 부여한 건축물 제압+일본의 위력 과시 의도)

4. 도로 개수 사업과 더불어 전통 건조물 파괴 작업 본격화(모든 건조물이 대상)

성벽 철거(직선 경관축=바로크적 식민도시, 격자형 가로망+지역지구제=근대적 도시로 개조)

-균질적 요소의 반복적 확장이 특징인 현대도시로 전환+가장 상징적인 서울의 규정요인 상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건조물 훼손 작업 착수(1911~

-궁궐(홍교 철거), 경희궁(일본인 중학교 건립+부지를 총독부 소유로 이관, 일반에게 방매)

-창경궁 내 건조물 철거+시민용 위락지로 개방(동물원·식물원·박물원), 명칭변경+격하(창경원)

-경복궁 경내 다수 전각을 민가에 불하하여 훼손, 1915년 모두 철거(조선물산공진회 개최)

근정전·교태전·경회루 등 중요 건물은 공진회 관람시설로 이용, 그 밖의 건물 철거

-경복궁 근정전 정면에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멸망왕조+식민통치권력의 극단적 대비 표현)

1919년 고종 사후 경운궁(고종 양위 후 덕수궁으로 개칭) 파괴 본격화

-경성제일고등학교 교사 건축(1922),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 교사 이전 신축(1923)

-경성부 청사 신축(1925), 1933년 경운궁을 공원으로 개조하여 일반에게 개방

5. 대한제국기 황권과 국권의 상징물로 조영된 각종 건조물 심각하게 훼손

원구단(토관제조장 설치), 황궁우·석고단(최신식 대형 철도호텔 건축), 독립관(서대문감옥 건축)

-도성의 관문이던 남대문 앞(경성 역사 건축), 장충단(일본 거류민단의 유곽 부지)

-고종황제 칭경기념비전(일본인 음식점 장식품), 남산의 국사당(관폐대사 조선 신궁 건축)

일제는 서울을 일본인 중심의 차별적 도시, 진압의 효율성을 강조한 억압적 도시로 개조

-도시 개수사업으로 일본인들은 막대한 토지자본 축적, 한일 상인의 자본격차 심화로 연결

전통적 중요 상징요소인 건조물 훼손·왜소화 시킨 후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주요 건물 배치

-문명 제국주의의 위용과 전통 권위의 왜소성을 동일 공간 위해 극단적 대비

-굴복+자기모멸적+제국주의의 지배 긍정을 생산하는 공간+서울 근대도시화 기본틀 형성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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