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서울, 중세도시에서 근대도시로
【1】 중세도시 서울의 원형: 유교적 가치와 풍수적 공간관이 서울의 원형을 규정
-서울은 한국사회 발전과정과 파생 된 문제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의 거울·시대아이콘
-서울의 근대화(현대화)는 중세적 원형을 변화+깨뜨리면서 진행
-영역 확대, 인위적 격자형 도로망,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건조물
【1-1】 한양 전도: 천도와 새 수도 건설(역성혁명의 정당성 입증, 가시적 표현)
1. 새 수도에 수기치인의 논리+중국 중심의 화이론적 세계질서 이념 표현
①신라말엽 지리도참설·풍수지리설 유행, 고려조에는 종교와 같은 힘 발휘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천혜의 수상 교통로인 한강이 부각되면서 한양천도론 형성
②한양을 남경으로 승격(고려 문종, 통일왕조의 정치적 입장 개입+삼국의 역사 포용)
-옛 고구려의 도읍(서경=평양), 신라의 도읍(동경=경주), 백제의 도읍(별경) 설치
-숙종 대 김위제가 『도선기』『삼각산명당기』를 근거로 남경천도론 제기=>남경개창도감 설치
③공민왕이 천도론 제기(고려 말, 정당성 입증 근거=지리도참설 활용=개경 지기 쇠약)
-남경은 200년 이상 방치된 도시로 대규모 토목공사 필요, 정세불안으로 중지
④우왕 대 한양 천도 급 결행, 종묘·사직 국가 중요시설 이전 미비로 5개월 만에 환도
-공양왕이 재차 한양천도 결행(개경은 인군을 폐축 하는 땅), 호환+우환 빈발로 다시 환도
-고려 말 2회의 천도 시도 실패는 중세적 사고+특권적 구조물인 귀족사회 반발 때문
2. 천도를 위해서는 정치·사회 지형의 전반적 변화가 필수 전제 =>새 왕조의 개창으로 실현
-이성계가 도읍 변경 주장, 왕조의 성쇠를 왕도의 지기와 연결(지리도참적 사고)
-도읍지 결정의 최종적 판단의 준거로 작용한 것은 한강, 한강은 천혜의 방어선이자 교통로
-경북궁 뒤편 일대로 결정(1394, 태조3), 동년 9월 신도궁궐조성도감 설치(본격적 도성 조영)
【1-2】 서울의 조영: 공간 원형은 풍수지리설과 유교적 이상도시론의 조화
1. 입지는 풍수지리설, 내부 공간 설계는 유교적 원칙을 담은 『주례』「고공기」 활용
①마크 새비지(도시공간은 권력이 흔적을 남긴 사회갈등과 정치과정의 물리적 고증물)
-서울 도시공간의 원형은 조화와 공존의 산물이 아니라 대립과 갈등의 결과물로 평가
②왕도 시설은 궁궐을 중심으로 전조후시 좌묘우사로 배치(『주례』「고공기」 원칙)
-조정(관아)은 궁궐의 전면에 포진(왕 관할), 시장은 궁궐 뒤에 잡아 후가 관장
-태묘(종묘=궁궐 왼쪽), 사직(오른쪽), 궁성 문의 수·도로의 폭원은 왕도의 위계에 따라 규정
2. 한양 자연공간은 제후국 왕도의 격식(『주례』)을 갖출 수 없는 대지 =>위치 왜곡 발생
①내사산(백악·인왕·낙타·목멱)으로 둘러싸인 분지+하천 =>자연 지형에 따라 시설 위치 조정
-주산(백악+북좌남향), 백악 아래가 아닌 분지 서북쪽 궁궐 기지 조성(시전 배치 공간 부족이 원인)
②종묘 자리를 응봉이 차지하고 있어 경북궁의 정동 아래쪽에 종묘 설치(불가피한 변형)
-문묘 건설 후 도평의사사 등 관아의 기지를 궁궐 전면 좌우에 마련(육조에 분배=육조거리)
③성곽 공사(도성 규모 결정)는 도성축조도감 설치를 계기로 시작(태조 4, 정도전 주도)
-높은 산지는 석성, 평지와 평산은 토성, 도성 8대문과 월단·문루 건축=>1398년 일단락(태조7)
-도로망 정비+행정구역 5부 52방으로 구획, 서대문<->동대문 사이 종루 설치(종로)
3. 제1차 왕자의 난 발생으로 도성 영건 공사 중단, 개경환도 결정(정도전의 조영 사업 좌절)
①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태종 5), 중단되었던 도성 조영사업 재개(태종이 지휘)
-태종은 정도전(신료 중심)과 반대로 왕권 중심의 국가로 구축(『주례』 변경)
-정도전이 설계한 경복궁을 사용하지 않고 응봉 아래, 종묘 북쪽에 새 궁궐 창건(창덕궁)
②경복궁은 궁역(사적 공간)과 궐역(정무처리+공적 공간)이 구분된 궁궐(중앙의 축선이 경계선)
-가장 큰 건물 수정전, 합동 연회장 경회루 등 격식에 충실+신권을 배려한 궁궐
③태종의 창덕궁은 궁궐의 입지에서부터 좌묘우사의 원칙 위배(종묘 북쪽)
-궁궐 내부 조영도 궁역과 궐역 구분 없이 궐내 각사는 왕의 전각에 종속되는 형태로 배치
-왕의 후원 조성, 신하들을 위한 공간을 배려하지 않은 결과(신하는 왕의 종복 표현)
-경복궁 신무문 뒤에 형성되었던 시장 폐지, 물종별 장시 지정(1410) =>전조후시의 원칙 폐기
5. 도성 내 중심 가로 좌우에 행랑 건설(1412, 행랑조성도감), 종루(광통교 북쪽, 보신각) 이전
①종로 좌우, 돈화문-정선방 동구, 경복궁 남쪽-종묘 앞, 종루-남대문, 종묘 앞-동대문
-설치된 대규모의 행랑은 대부분 시전 점포로 사용, 일부는 관아 건물로 이용
②행랑 건설로 새 도읍지 기반시설 정비 완결(중심대로의 폭 확정, 도심부의 인공 경관 정비)
-행랑은 도성 내부를 가시적으로 구획하는 구조물, 남북 지역은 주택가 형성
6. 태조대의 조영공사와 태종대의 추가적 조영공사는 서로 다른 정치적·사상적 맥락에서 형성
①도시 공간에 태종 이방원으로 상징되는 군권과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신권의 길항·대립 표현
-공통점은 숭유억불, 종교시설은 도성 내 배치 금지(불교사찰), 도성민을 위한 장소도 금지
②왕과 관련된 시설들만 설치, 서울은 왕도, 왕의 권위만이 유일한 권위로 인정받는 도시
-공적 시설이 밀집한 도성의 북부(궁궐·관아·시전)는 상위 공간, 남쪽은 하위 공간으로 인지
【1-3】 조선 후기 서울 경관의 변화: 인구증가로 주거 시설 확장이 경관변화의 주원인
1. 목재가 주재료(화재에 취약+소방체제 마련 =>방화장+소개지)
①16세기 말~17세기 초 임진왜란 시 방화로 건조물 파괴(경복궁 전소+창덕궁+종묘)
-전란 후 도성 재건(창덕궁·종묘·경덕궁=경희궁 건축), 종루는 종각으로 재건(격식·규모 축소)
-경복궁은 입지가 불길하다는 인식으로 대원군 때까지 폐허, 창경궁·인경궁 등 궁궐 비중 증가
②전란 이후 병영·창고 등 도성 외곽·성 밖·한강변에 군사적 시설들 증가, 도성 내 변화 無
-숙종 대부터 외침이나 내란대비 관방시설(북한산성·남한산성·탕춘대성·서울성곽) 수축 활성화
-영조 대 도성민 생활 안정을 위한 대규모의 준천 사업 추진, 정조대 화성 건설 공역 진행
2. 양란 이후 사적 건조물(민가)이 도성 내 경관 변화에 결정적 구실로 작용 =>인구 증가
①인구 10만 수용 규모로 설계된 도시, 17~18세기에 두 배 이상의 인구가 서울로 집중
-군제개편(상비군 병력·식솔), 전란복구(대규모 노동력 필요), 급가모립(대리역 행위) 일반화
-농업생산력 상승(기술개발+시비법+수리사업)으로 농촌의 유휴 노동력 서울로 이주
②도성 주변과 경강 일대에 새로운 상업거점 형성·발전도 인구 증가 배경으로 작용
-경강변과 도성 주변이 도시의 일상 생활권으로 전환 =>서울의 공간적 경계 확장
-18세기 서울 강북 지역 전체가 한성부 행정 관할지역으로 편입
③경강변의 용산·마포·서강·송파·양화진이 상업 거점으로 부각 =>상업 사용인의 주거 시설 증가
-신축된 성곽(북한산성·탕춘대성)과 병영·관창 주변 지역이 주거지 및 근교 농업지역으로 변모
3. 도성 내 거주 공간의 구조·경관 변화 본격화(17세기, 인구20만, 주택문제 부각)
-여가탈입(권세로 주택 탈취), 공한지+개천변을 집터로 활용, 사회적·계층적 분리 경향 심화
-조선 초기 일반적 필지구조는 양반관료 점거한 대형필지 중심으로 시민들의 택지 조성
-조선 중엽 이후는 정치·사회적 변동으로 지위·신분·당파별로 분리 =>당파끼리 모여 거주
4. 19세기 오촌·양대·자내·오강으로 주거 공간 구분, 공간분할에 권력관계 반영
①오촌: 동(낙산언저리)·서(인왕산 밑 서소문 주변)·남(남산기슭)·북(백악아래)·중의 다섯 촌
-궁궐 가까운 북촌(노론), 토질 나쁜 남촌(무반과 남인), 동촌과 서촌에는 소론과 북인
-중인·서얼은 광교->효경교 개천변 양안 일대에 중촌에 집거
②양대: 윗대·아랫대로 경복궁 주변 육조 일대 상촌(윗대)에는 궁궐붙이들 거주
-하급 무관과 직업군인들은 개천 하류 부근 오간수문과 광희문 주변 아랫대에 거주
③오강은 경강변 주거지역으로 경강 상업 관련 상인과 상업사용인들이 거주
④자내는 성 밖의 거주지(도성보수·경비 담당기관·지역 배정+천자문 순서대로 붙인 이름)
-근교 농업에 종사, 도성 민들에게 채소 등 공급하는 영세상인들 거주
5. 도시 외곽 자내와 오강 일대에서 도시 공간의 근대적 변화 전개(사회질서·경제체제 확산)
-새벽시장인 대규모 조시 형성 =>이현(동대문 광장시장 일대), 칠패(서울역 봉래동 일대)
-자내는 근교 농업 지대로 특화, 오강은 신흥 상업지구로 발전
【2】 황도의 꿈, 식민도시의 상징
【2-1】 대한제국기의 도시 개조: 개항 이전 경제적·실용적 관점에서 도시 가로망 개선 주장
1. 중국 도로 체계에서 시작된 도로 개수론이 개항 이후 일본과 서구의 영향으로 확산
-김옥균이 치도규칙 작성(1882, 일본 조사시찰단), 박영효가 치도국 설치하여 도로 정비 착수
-경제적 관점의 치도+유럽·미국·일본의 도로체계 정보 수집, 재정적 문제로 치도사업 중단
2. 갑오개혁 이후 국가가 도로 개수사업 진행(1895, 가가금령=도로 주변 가옥 건축금지)
①도로수치+가가기지 관허 결정(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 한성 내 도로 폭원을 규정 승계
-내부령 9호는 대한제국기 서울 개조사업 신호탄, 종로·남대문 가가 철거(관허된 것은 제외)
②경운궁으로 환궁 이후 경운궁 중심의 환상방선형 도로망 개착 시작(1897, 고종)
-시각 종점에 원구단·독립문·기념비전 등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 건조물 착공
➂도로 개설 후 전차 부설(1898), 종로-남대문 증설(1899), 종로의 중심성 강화
-시민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시전가는 서울의 중심 간선도로(경운궁·경희궁 사이 관통)로 변화
-경운궁 뒤편 경인철도 경성정거장 건립, 마포를 시발점으로 하는 서북철도 공사 개시(1902)
-경강변 상업 근거지와 도성 안을 철도로 연결 =>철도 중심의 전국적 교통망 정비
3. 도로 개수·개착 후 황궁 정비(1896, 경운궁 수리->선원전·함녕전·보문각)
-1898년 궁궐 주변 외국인 가옥 매입, 수옥헌·중명전·정관헌 등 양관 신축
-궁궐처럼 사용할 경희궁 수리 후 홍교건설(1901), 경운궁·경희궁을 연결한 최초의 대형 육교
4. 대한제국기 도시 개조사업은 근대국가의 수도 이미지+황권+독립국가의 정치적 표현
①시민의 고충을 직접 듣는 공시인순막 자리에 근대적 도시공원인 탑골공원 건설
-황도의 중심 대로변에 공원 조성 =>민의의 공간+제왕의 길 간 상시적 연계점 형성
-공원 공사 착수 직후 만민공동회 개최, 시민의 공간으로 기능하던 곳
②도성 삼대시장은 조시(이현, 칠패)와 낮 시간 대 상품 거래(종로 좌우 가가)
-종로 철거 후 상거래 장소를 선혜청 창고 자리로 이전(최초 상설시장-현 남대문시장 원형)
-도시중앙시장은 상설시장의 모범으로 작용 ==>1905년 이현에 광장시장 개설
-상설시장은 도시 내 소비시장 확대·도시미관 개선·민의 소통 공간 확장 역할 수행
5. 도시공간에 절대주의적 국가관 표현, 황권 절대화 방향의 특징=>내재적 발전과정
-환상방사선형 도로, 황권의 존엄성과 국가의 자주성 상징 건물+기념 조형물 설치
-종로의 공원조성, 도시 중앙시장 신설 등 황제와 민 사이, 민 상호 간 소통중시
-종로(중심가로 위상 부여)->마포(경강변 상업거점+경과점)->개성·평양·의주와 연계 도모
【2-2】 일제 초기 경성 도시 개조사업
1. 서울로 진입한 외국 세력이 권위와 영향력 강조를 위한 가시적 구조물 축조
①고딕 양식의 교회(천주교+미국 기독교교회), 각국 공사관과 일본이 성 내 건축물 건립
-1880년 일본 공사관 설치 후 일본인 거주 시작, 조영통상조약 체결(1885) 이후 본격화
②외국인 잡거를 우려한 정부가 각국 공사들과 협의하여 국가별 거류구역 제한
-경운궁 주변 정동(유럽·미국인), 수표교 남쪽-종현(을지로-명동성당, 청국), 일본(남산기슭)
③일본공사관 주변 남산 기슭에 일본 집단 거류지 형성(이현=진고개)
-중심상권인 종로 진출 희망, 청일전쟁 후 청국 후퇴로 확보
-이현<->남대문 길 개수+교차점을 근거지로 확보(영사관·거류민총대역장·상업회의소 이전·신축)
2. 러일전쟁(1904) 후 일본인 이주 증가+거류지 확대(남촌 일대를 집거지로 장악, 혼마치=본정)
①본정6정목~9정목(충무로1~5가), 남대문+을지로~광희문+육조거리~남대문(태평로) 개수공사
-일제가 경성도로 개수사업 추진(1912), 기본계획안(시구개정예정노선+시가지건축물취체규칙)
②1918년까지 남촌 내부+도심을 연결하는 도로 개수 =>일본인 거주지 중심으로 재편
-시구개정 예정노선은 격자형의 직선도로망, 기존 상징적 건조물(종묘·경희궁·덕수궁) 절단
-황토현 광장(광화문 네거리)과 황금정 광장(을지로 입구) 중심 환상방사선형 도로망 구성
③광화문·서울역 간 직선상징축은 효과적 병력 이동선(중심가로의 노폭 확장과 직선화)
-주차군 사령부(용산), 제60연대(대한문 앞), 헌병대(광화문 앞) 등 군부대로 연결
-파리코뮌(1871) 이후 만들어진 파리 시가지계획의 핵심 내용+근대 도시계획 답습
-경성 시내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한 도로망 계획(진압을 위한 공간적 편제)
3. 3.1운동 이후 기존 도로에 부분적인 수정을 가하여 축소 시행
-광화문 중심의 두 개의 방사상 도로 신설, 도성 밖으로 통하는 도로 확장
-광화문·남대문·용산을 잇는 도로 건설(상징성을 부여한 건축물 제압+일본의 위력 과시 의도)
4. 도로 개수 사업과 더불어 전통 건조물 파괴 작업 본격화(모든 건조물이 대상)
①성벽 철거(직선 경관축=바로크적 식민도시, 격자형 가로망+지역지구제=근대적 도시로 개조)
-균질적 요소의 반복적 확장이 특징인 현대도시로 전환+가장 상징적인 서울의 규정요인 상실
②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건조물 훼손 작업 착수(1911~
-궁궐(홍교 철거), 경희궁(일본인 중학교 건립+부지를 총독부 소유로 이관, 일반에게 방매)
-창경궁 내 건조물 철거+시민용 위락지로 개방(동물원·식물원·박물원), 명칭변경+격하(창경원)
-경복궁 경내 다수 전각을 민가에 불하하여 훼손, 1915년 모두 철거(조선물산공진회 개최)
③근정전·교태전·경회루 등 중요 건물은 공진회 관람시설로 이용, 그 밖의 건물 철거
-경복궁 근정전 정면에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멸망왕조+식민통치권력의 극단적 대비 표현)
④1919년 고종 사후 경운궁(고종 양위 후 덕수궁으로 개칭) 파괴 본격화
-경성제일고등학교 교사 건축(1922),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 교사 이전 신축(1923)
-경성부 청사 신축(1925), 1933년 경운궁을 공원으로 개조하여 일반에게 개방
5. 대한제국기 황권과 국권의 상징물로 조영된 각종 건조물 심각하게 훼손
①원구단(토관제조장 설치), 황궁우·석고단(최신식 대형 철도호텔 건축), 독립관(서대문감옥 건축)
-도성의 관문이던 남대문 앞(경성 역사 건축), 장충단(일본 거류민단의 유곽 부지)
-고종황제 칭경기념비전(일본인 음식점 장식품), 남산의 국사당(관폐대사 조선 신궁 건축)
②일제는 서울을 일본인 중심의 차별적 도시, 진압의 효율성을 강조한 억압적 도시로 개조
-도시 개수사업으로 일본인들은 막대한 토지자본 축적, 한일 상인의 자본격차 심화로 연결
③전통적 중요 상징요소인 건조물 훼손·왜소화 시킨 후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주요 건물 배치
-문명 제국주의의 위용과 전통 권위의 왜소성을 동일 공간 위해 극단적 대비
-굴복+자기모멸적+제국주의의 지배 긍정을 생산하는 공간+서울 근대도시화 기본틀 형성 과정
'세계의 도시와 건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양, 도시공학, 건축, 방통대 등 세계의 도시와 건축 요약정리 6. 인도 델리, 역사성과 식민성이 만나는 곳 (1) | 2022.08.30 |
---|---|
교양, 도시공학, 건축, 방통대 등 세계의 도시와 건축 요약정리 5. 동방의 뉴욕, 상하이 (2) | 2022.08.30 |
교양, 도시공학, 건축, 방통대 등 세계의 도시와 건축 요약정리 4. 도쿄의 역사와 문화 (0) | 2022.08.29 |
교양, 도시공학, 건축, 방통대 등 세계의 도시와 건축 요약정리 3. 후기 조선시대의 도시계획, 화성 (1) | 2022.08.29 |
교양, 도시공학, 건축, 방통대 등 세계의 도시와 건축 요약정리 2. 서울 근대 도시건축의 전개와 변화 (0) | 2022.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