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러시아의 근대화와 제국주의: 소련 시대
<<용어정리>>
○ 네프멘: 신경제정책의 결과 생겨난 소규모 사기업가들을 가리키는 말. 네프멘은 소련 지
도자들에게 자본주의 경제체제로의 복귀 징후로 여겨져 맹렬한 공격을 당했다.
○ 독소 불가침 협정: 2차 대전 직전 소련과 나치 독일이 맺은 상호 불가침 조약. 나치 독
일의 전쟁 위협이 고조되어가는 과정에서 연합국과의 집단안보를 고려했던 소련은 독일과
손을 잡는 방향으로 대선회한다. 체제의 성격상 상호 적대적이었던 두 국가의 조약은 세계
를 놀라게 했으며, 특히 공산주의 운동 진영의 충격이 컸다. 이 협정의 비밀 보충 협약에서
소련은 혁명 과정에서 떨어져 나갔던 폴란드의 3분의 1과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및 핀란드
에 대한 영향력 행사, 그리고 루마니아에 편입되었던 베사라비아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 받
았으며 실제로 전쟁 발발 이후 발트 3국,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 및 폴란드와 핀란드 일부
를 합병했다.
○ 볼셰비키: 1889년 창당된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의 분파였으며 소련공산당의 모체.
1917년 10월 혁명을 주도해 러시아의 사회주의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 지도
자는 레닌이다. 볼셰비키라는 이름은 다수파라는 뜻인데, 1903년 2차 당 대회에서 당원 규정
을 두고 벌어진 논쟁에서 다수를 점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름과는 달리, 정권을 잡게
된 1917년 10월 이전까지 가장 급진적인 좌익 분파로서 극소수에 그쳤다.
○ 사회주의 혁명: 1917년 10월 세계 최초로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 자본주의 체제의 문
제를 지적하며 자본을 사회가 공유해 경쟁 없이 이상적으로 발전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
다. 러시아에서는 자유주의 혁명과 함께 진행되었다.
○ 소비에트 정권: 1917년 10월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가 세운 권력. 1991년 해체
될 때까지 냉전의 한 축이자 동구권을 대표하는 초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사회주의 체제
를 지향하고 세계 혁명을 지지하면서 제 3세계의 탈 식민운동에 상당한 양의 지원을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 동구권 국가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유지했고, 중국이나 쿠바와는 줄곧 불
편한 관계였다.
○ 스탈린 혁명: 반대파를 몰아내고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스탈린이 본격적으로 실행한 5
개년계획을 통해 이루어진 급격한 경제성장과 이에 따라 일어난 러시아 사회 전반의 변화를 통칭하는 말. 스탈린은 중공업 위주의 급격한 발전과 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이전 시대에
비해서 분명하게 개선된 일상생활을 러시아인들에게 남겼다. 이 덕분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2차 대전 중 독일과 싸워 이길 수 있었으며, 생산량 경쟁에서 성공한 개인들을 비롯해 당
간부나 전문가 등을 중심으로 보다 풍족한 생활이 가능해졌다.
○ 신경제정책: 1921년~28년 사이 소련이 채택했던 경제정책. 러시아 공산당은 1차 대전과
혁명, 내전과 간섭전의 충격으로 피폐해진 러시아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 전시공산주의 정
책에서 신경제정책으로 돌아섰다. 전면적인 국유화와 화폐 폐지 등을 골자로 하는 전시공산
주의 대신 도입된 신경제정책은 농민과 소규모 기업가들의 경제적 자유를 확대하고 노동시
장에 다시 경쟁을 도입했으며,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자 했다.
○ 체코슬로바키아 반란: 1968년 봄 둡체크가 공산당 1서기로 선출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대규모로 일어나 소련군에 의해 진압된 개혁운동. 프라하의 봄이라고도 불린다. ‘인간의 얼
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슬로건 아래 지신인과 민중을 아우르는 개혁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바
르샤바 조약의 유지를 목적으로 개입한 소련의 막강한 군사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패했다.
○ 페레스트로이카: 1985년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고르바초프가 벌인 개혁 정책으로,
경직된 소련 사회를 쇄신하는 방법으로 제시되었으나 결국 소련 해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
었다. 폴란드 연대노조의 선거 승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혁명, 루마니아 차우세스쿠 정
권 붕괴 여파로 동유럽 블록 해체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브레주네프 독트린의 폐기와 ‘신사
고’ 정책 등이 이런 경향을 부추겼다.
○ 폴란드 개혁 운동: 1956년 폴란드에서 일어난 노동자 처우 개선 요구하는 시위와 그 뒤
에 이어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개혁정부를 구성한 일. 1955년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의 지
도자로 등장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비판 연설 이후 평화 공존론을 주장했다. 자생 스탈린
주의자 대신 고무우카를 중심으로 폴란드는 경직된 스탈린주의 체제를 이완시키는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다.
○ 헝가리 봉기: 1956년 헝가리에서 일어난 반정부 봉기를 일컫는 용어. 소련과 유착해 일
당 독재를 펼치는 헝가리 공산당에 대한 불만이 흐루시초프의 집권과 폴란드 개혁 운동의
자극을 받아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련군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었고, 임레
나지의 개혁정부까지도 바르샤바조약 기구 탈퇴를 선언해 러시아의 개입을 초래했다.
<<내용요약>>
1. 신경제정책
① 제 1차 세계대전과 혁명, 내전과 간섭전으로 러시아 국가 경제는 완전히 파산.
② ‘전시 공산주의’: 과도한 급진적 사회주의 정책(전면적인 국유화나 화폐 폐지 등) - 사정
을 더욱 악화시킴.
③ 신경제정책(NEP) 도입(1921년 3월 제 10차 공산당 대회): 레닌의 제안, 경제 전반에 시
장 원리를 어느 정도 도입함으로써 혼합 경제를 조직하고 경제 회복을 꾀함.
가. 곡물 할당 징발제를 식량 현물세로 대체: 농민들은 세금을 납부한 뒤 나머지 생산물을
자유롭게 시장에 팔 수 있게 됨.
나. 농민들의 토지 임대 및 노동자 고용 허용: 농민들의 생산성 증진 도모 가능성.
다. 국가는 은행, 운송, 통신, 해외 무역 및 중간 이상 규모의 기업만 통제.
라.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경쟁적 노동 시장에 자유로운 참여 가능.
마. 외국 투자가들에게 경제를 개방하여 벌목과 광업 등의 분야에서 외국 자본 유치
2.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 성립(1922년 12월)
① 신경제 정책의 성과: 해외 투자 유치에는 실패, 빠른 속도로 경제 회복, 국민들의 생활수
준 고양, 사회적 분위기도 전반적으로 자유로워짐.
② 소비에트 권력의 확고한 정착: 러시아 공화국을 핵심으로 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 성립
3. 강제적 공업화와 그 결과들: 스탈린의 폭력적 농업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
① 신경제정책의 사실상 폐지: 1928년 말 스탈린의 주도
② 스탈린의 권력 장악: 공산당 내의 1인자로 부상
③ 폭력적 농업 집단화를 동반한 급속한 공업화 전략(새로운 근대화 프로그램으로 채택)
- 1 2차 5개년 공업화 계획 실시
④ 중공업 부문을 비롯한 대부분의 부문에서 목표에 이르지 못함 - 특히 농업과 경공업의
성과는 현저히 미흡
⑤ 비현실적인 목표와 자원 및 노동력의 무모한 동원은 소비에트 사회에 부정적 유산 초래
- 중공업 위주의 경제 발전은 국민 생활 피폐
- 농업 생산은 집단화로 파탄
4. 제 2차 세계대전과 ‘소련 제국’의 형성
① 히틀러의 침공: 히틀러의 등장은 소련의 근대화 전략 위협, 독일과의 불가침 협정에도 불
구하고 1941년 6월 히틀러의 소련 침공, 개전 초기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
② 소련의 승리: 1942-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를 기점으로 상황 반전, 소련군은
1945년 봄 베를린 점령.
③ 소련의 동유럽 장악: 동유럽에 영향력 확대 시도
-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보상받고자 함
- 특히 동유럽 지역 전체를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로 이용하고자 함. -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독일의 점령
지역에서 지위를 굳혀감.
5. 동유럽의 반란과 소련제국의 위기
① 스탈린의 사망(1953년)
-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로 흐루시초프 등장(1955년)
- 스탈린 격하 운동 개시(1956년 제 20차 공산당 대회)
- 기존 대외 정책에 대한 근본적 수정: ‘평화공존론’은 향후 소련 외교의 기본 방침이 됨.
② 외교정책 변화가 초래한 큰 파장
-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소련의 공산주의 지배에 반대하는 유혈사태: 소련군의 대규모 개입
으로 일단락,
- 1956년 이후 동유럽 정권들의 안정세
- 1968년 봄 체코의 대규모 개혁운동: 소련 지도부의 무력 진압.
③ 1985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신사고 정책
- 동유럽 사회의 대변혁
- 사회주의 블록의 해체는 소연방 자체의 해체와 동시 진행
- 1990년 이후 발트 3국의 독립은 소연방 해체에 결정적 역할
<<생각해 볼 문제>>
1. 소련이 몰락한 원인에 관해 생각해 보자.
스탈린 사망이후 후르시초프의 비밀연설부터 시작된 소련의 변화는 대외적으로는 외교 방
침의 변경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새로운 노선에 반발했고, 서유럽 공산당들은 유로 코뮤니즘
노선으로 응답했으며 동유럽에서는 폴란드와 헝가리가 개혁 및 이탈의 움직임을 보였다. 소
련은 폴란드와 헝가리에 강력하게 개입했으며, 특히 헝가리가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서 탈퇴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군사력을 투입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봄’과 뒤 이은 소련의 무력개입은 이런 맥락 위에 있다. 국제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브레주네프 독트린을 통해 무력개입을 정당화했다. 80년대 폴란드에서 연대 노조의 저항이
거세어졌을 때도 소련군은 브레주네프 독트린에 의지해 개입할 수 있었다.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우위는 결국은 강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 소련에서 경직된 공산당 관료제와 점차 의식수준이 높아지는 대중 사이의 괴리는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다. 사회의 근본적 재편이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보 공개와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져야 했다. 고르바초프는 1985년 당 총서기로 취임해
레닌주의로 되돌아가자는 표어아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을 목표로 설정했고, 이를 위한 가
장 기본적 수단으로서 ‘글라스노스트(공개성)’ 정책을 천명했다. 이는 시의 적절했던 만큼 혼
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컸으며 실제로 소련에는 큰 혼란이 밀어닥쳤다.
가장 큰 문제는 공산당 내부에서 이 정책에 대한 전반적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실상 소련이 맞닥뜨린 전반적 문제의 핵심 원인은 당이었다. 공산당은 반드시 개혁되어야
만 했지만 방법을 두고 보수파, 개혁파로 나뉘었다. 분열은 계속되어, 보수파는 현상유지를
주장하는 파벌과 완만한 개혁을 주장하는 파벌로 나뉘었고, 개혁파는 공산주의 안에서 급진
적 개혁을 실시하려는 파벌과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파벌로 갈라졌다. 분열된 당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당에 의존하던 국가권력은 진공 상태에 빠진데다 글라스노스트가 공
산당의 권력 독점에 큰 타격을 가했다. 그 와중에도 인민의 생활고는 가중되었다.
소련 내부의 변화와 함께, 폴란드 연대노조를 시작으로 동유럽 전반에 걸쳐 개혁 움직임
이 시작되었다.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대부분의 국가에서 기
존의 경직된 공산당 정권이 개혁을 시작하거나 개혁적 정부로 교체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동유럽 국가에만 그치지 않고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도 이루어졌다. 분리주의 운동이 거세어
졌고, 결국 발트 3국이 독립했다. 러시아는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옐친 대통령을 중심으로 재
편되었고, 연방 내의 공화국들이 잇달아 주권을 천명했다. 1991년 8월, 혼란 속에서 공산당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시민의 반발과 군부의 비협조로 3일 만에 실패한 보수파의 쿠
데타는 공산당의 불법화로 이어졌다. 이것이 결정적인 조치였다. 공산당은 소비에트 연방을
유지하는 핵심 고리였고, 공산당의 소멸은 곧 연방의 해체를 의미했다. 옐친은 소련을 대체
할 독립국가연합을 출범시켰다. 소련이 해체된 것이다.
2. 소련 체제 확립 이후 소련의 영토 확장 과정을 제국주의적 팽창과 비교해 보자.
소련의 영토 확장은 크게 세 개의 기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
일의 패전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무효화되면서 할양되었던 영토를 되찾았을 때
이다. 이로서 1922년, 제정러시아의 영토에는 못 미치지만 상당한 영토를 회복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성립된다. 두 번째 확장은 독소불가침조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조약의 비밀 보충 협약은 제정러시아의 영토였던 폴란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와
베사라비아를 소련에게 보장하고 있었다. 핀란드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에 소련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효과적으로 저항했던 핀란드 역시 일부 영토를 합병당하
고 군대 주둔을 허용하는 상호원조협정을 맺어야 했다. 마지막 확장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전쟁 피해에 대한 보상을 원한 소
련은 독일 동부를 점령하고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로부터 영토의 일부를 합병하
고 인정받았다. 더 나아가 소련은 동유럽을 서구권의 침략을 막는 완충지대로 만들고자 했
다. 이를 위해 소련은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그리고 독일의 점령지역을 소비에트화 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1947년 9월에 미국
이 유럽에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상설 조직인 “코민포름”(Cominform)이 창설되었다.
1949년에는 소련이 중심이 되는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가 구성되고, 1950년대 중
반에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도 창설되었다. 이 기구들은 동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보장
해주는 기능을 수행했다.
사회주의 이념이 기본적으로 내세우는 반제국주의 이념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제국주의적
팽창과 유사한 방식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물론 소련의 영토 확장은 고전적 의미의 식민지
정복과는 양상이 달랐다. 그러나 같은 시기 서구의 구제국주의 국가들이 독립한 옛 식민지
들에 미치던 경제적 영향력을 고려해보면, 소련은 탈식민시대의 방법으로 식민지를 확장했
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동유럽의 위성국가들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적
위계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크게는 냉전 구도부터 작게는 개별 국가간의 상호 이해관계까
지 국제정치적 역관계가 소련의 영토 팽창을 촉진하거나 제한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소
련의 우위는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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