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와동서양

역사학, 문화교양학과, 논술 등, 방통대 근대화동서양 요약 정리 9. 미국의 근대화: 개혁의 완성

롤라❤️ 2023. 1. 2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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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미국의 근대화: 개혁의 완성

<<용어정리>>
○ 기독교 근본주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해 성서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분파로 20세기 초 미국 남부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기독교 근본주의
는 정치, 사회적으로 보수적이며 특히 미국에서 인종 차별을 조장한다. 미국 남부 주들에서
는 교육에도 기독교 근본주의를 적용해 진화론을 배격했다.
○ 뉴딜 정책: 대공황 이후 선출된 민주당 출신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가 추진한 적극
적인 경제 개입 정책. 긴급 은행법을 통해 금융위기를 넘긴 루즈벨트는 대다수 국민의 지지
를 받아 농업조정법, 산업부흥법, 주택소유자 대부법 등을 제정했고, 테네시 계속 개발 공사
라는 엄청난 규모의 국가 주도 대공사를 주관하여 고용창출을 비롯한 경제 활성화를 도모했
다. 또한 전국 노사 관계법과 사회 보장법이 제정되어 복지 측면에서도 개선이 이루어졌다.
○ 대공황: 1929년 뉴욕 증권 시장 붕괴로 촉발되어 이후 십여 년간 지속된 세계적 불황을
가리킨다. 1920년대의 호황과 함께 낙관적인 세계관이 대공황을 기점으로 끝났으며, 서구를
비롯한 전 세계의 정치체제가 격변을 겪었다. 대공황의 원인으로는 우선 과잉 생산과 투기
를 들 수 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를 자유방임주의의 결과로 보고, 적극적인 경제정책과
국가 주도의 사업을 통해 공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유럽에서 대공황은 독일과 이탈리아 및
여러 국가의 파시즘 혹은 권위주의 정권의 등장을 초래했고, 이는 결국 2차 세계대전의 발
발로 이어졌다.
○ 보수주의: 1차 대전 이후 미국은 정치, 경제 모두 보수적인 경향을 강하게 나타냈다.
1920년부터 28년까지의 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공화당 정부는 자유방임주의에
의거한 경제정책을 고수했다. 이에 따라 이전 시대의 혁신주의와는 상반되는 정책이 행해졌
고, 20년대의 호황이 사회적 격차를 가렸다.
○ 토착주의: 1차 대전을 전후해 미국에서 고조되었던 반독일 정서에서 출발한 외국인 배
척 운동이다. 반공주의와 맞물려 작용했고 주로 이민자들에게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게 했다.
그러나 미국의 토착주의는 오래 갈 수 없었다. 19세기 말 미국은 지나칠 만큼 다양한 민족,
인종, 종교, 언어의 집합체였고, 국내에서조차 높은 인구 유동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미국 토
박이나 지역 토박이를 찾기 어려운 미국의 상황에서 정체성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기
쉬웠다.


<<내용 요약>>
1. 1차 대전 이후 보수주의와 적색공포의 광풍: 개방과 다양성 포기, 폐쇄적인 분위기
① 국민들은 전후 극심한 경기 침체와 사회불안을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및
공산주의자의 탓으로 돌림.
② 1920년대 후반 적색공포의 광풍은 반(反)이민 정서와 미국 남부를 중심으로 조직화되고
집단화된 인종 편견으로 이어짐.
③ 1920년대 선거에서 공화당 압승: 보수주의로의 급선회가 정치에 반영 - 하딩, 쿨리지, 후
버 대통령들은 자유방임주의를 표방, 국가 간섭 최소화, 경제 및 사회 전반에서 효율성 추구
2. 자본주의 경제와 문화의 발전: 이면의 심각한 어두움과 인간 소외
3. 미국 자본주의 최대의 위기: 세계대공황
유럽 등 세계 전반의 공황과 연루되어 경제 회복의 어려움 - 미국인의 엄청난 심리적 충격
4.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정책
① 1932년 새로운 지도자로 선택된 루즈벨트는 대공황의 본질과 국민 정서 간파 - ‘행동하
는 행정부’를 약속하고 뉴딜정책 시행
② 농업조정법, 산업부흥법, 주택소유자 대부법 등 제정/ 테네시 계속 개발 공사라는 국가
주도 대공사 주관/ 고용창출을 비롯한 경제 활성화 도모
③ 대공황의 늪에서 서서히 빠져나옴
④ 2차 대전 참전을 계기로 대공황 완전 극복
5. 대공황의 의미: 새로운 시작의 갈림길 - 정부 주도형 사회 복지 국가 추구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 체제 종결 : 대통령과 연방 정부의 역할 극대화

<<생각해 볼 문제>>
1. 미국에서 토착주의가 실패한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자.
토착주의란 1차 대전을 전후해 미국에서 고조되었던 반독일 정서에서 출발한 외국인 배척
운동이다. 반공주의와 맞물려 작용했고 주로 이민자들에게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게 했다. 그
러나 미국의 토착주의는 오래 갈 수 없었다. 19세기 말 미국은 지나칠 만큼 다양한 민족, 인종, 종교, 언어의 집합체였고, 국내에서조차 높은 인구 유동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미국 토박
이나 지역 토박이를 찾기 어려운 미국의 상황에서 정체성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기 쉬웠다.
미국 인구의 지리적 유동성은 매우 높다. 상당수 미국인들은 한 곳에서 오래 정착하지 않
았다. 190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미국 태생의 4분의 1 정도는 태어난 주를 떠나 다른 주로
이동을 했다. 인구 구성은 물론이고 심지어 주 의회 의원들도 지역 토박이가 아닌 경우가
태반이었다. 전통적으로 가장 인구 유동성이 낮았던 중서부의 아이오와 주에서도 그 인구의
3분의 2는 다른 주 출신들이었다. 산업체를 끼고 있는 보스턴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이러한
유동성이 더욱 두드러져, 50만 명 가운데 단지 64,000명만이 그 도시 태생이었다.
게다가 미국에는 다문화주의 혹은 다원주의(pluralism )가 철저하게 정착했다. 19세기
말 미국은 온갖 다양한 민족, 인종, 종교, 언어의 집합체였다. 어느 한 집단이 하나의 이
념으로 미국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남북 전쟁 이전에 토박이들
은 아일랜드인들이 홍수처럼 몰려오자 대대적인 반 가톨릭, 반 아일랜드 이민 배척 운
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는 수많은 민족이 짧은 기간에 급격히 이주해 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짧은 기간에 미국으로 건너왔기에 기존의 미국인들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거나 태도를 정할 수 없었다. 서부로 향하는 골드러시와 철도의 발달, 급격한
산업화는 미국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미국은 어떤 민족이 중심이 되어서 어떤 국가로 만들어
져야 하는지에 대한 사상적 혹은 이념적 논쟁에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일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2. 제 1․2차 세계 대전이 미국의 근대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1차 산업혁명 이전에 이미 산업혁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미국은 승전 이후 정치적 보
수화와 함께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전쟁 이전의 혁신주의 개혁은 화려한 세속 문화
와 성공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이 절정에 달할수록
그 이면에서 빈부격차와 인간 소외 또한 심각해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미국 자본주의 역시
최대의 위기를 향해 가고 있었다. 1929년 10월 24일 월스트리트 증권 시장에서 시작된 대공
황은 전후의 낙관적인 분위기를 일소하고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전 세계의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대공황은 미국이 이전의 자유방임주의에서 보다 강력한 국가와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 복
지정책으로 돌아서도록 만들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은 이러한 변화의 결과물이
었다. 금융, 증권 시장 뿐만 아니라 농업과 산업에 정부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포괄적인
정책이 실행되었으며, 그 결과 미국경제는 침체의 나락에서 일부나마 되살아날 수 있었다.
빈부 격차와 노동자 문제 역시 사회보장법과 노사 관계법 등을 통해 개혁되었다.
유럽, 특히 독일이 대공황에 의해 받은 타격은 결국 파시즘의 발호와 2차 대전의 발발로
이어졌다. 미국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에 뛰어 들게 되었다. 셀 수 없는 규
모의 피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결정적으로 대공황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계
기는 2차 대전의 참전이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대통령과 연방 정부의 역할이 극대화되었
으며, 그런 점에서 대공황은 미국이 1세기 반 동안 지켜왔던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 체제의
종결임과 동시에 정부 주도형 사회 복지 국가로 나아가는 새로운 시작의 갈림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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