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와동서양

역사학, 문화교양학과, 논술 등, 방통대 근대화와동서양 요약 정리 6. 독일의 정치적 근대화

롤라❤️ 2023. 1. 27.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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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독일의 정치적 근대화

<<용어정리>>
○ 관세동맹: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빈체제를 구축한 반동복고(反動復古)적 유럽에서 독일
은 개별 주권을 가진 많은 영방국가들의 모임인 독일연방(Deutscher Bund)을 수립했다. 각
국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된 연방의회(Bundestag)가 독일연방의 행정기구였으며 오스트리아
와 프로이센이 이를 주도해 게르만 민족통일과 자유를 목표로 삼는 모든 정치활동을 탄압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경제발전은 지속되었다. 1834년 관세동맹(Zollverein)이 맺어
져 통일된 경제시장이 독일에서 열렸다. 오스트리아는 이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1835년에는
독일 최초의 철도도 개설되었다. 독일에서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노동문제 역시 대두되었고
독일의 초기 노동운동이 이 시기에 싹을 틔웠다.
○ 독일제국: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숙원은 소독일주의에 입각한 독일 민족국가의 수립이었
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방해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비스마르크는 북독일연방을 확장시켜
독일제국(Deutsches Reich)을 수립했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이 선
포되고, 초대 황제로 프로이센의 국왕인 빌헬름 1세가 즉위했다. ‘위로부터’ 이루어진 독일통
일은 프로이센의 확대로 받아들여졌다. 제국의회(Reichstag)는 제국행정부에 책임을 물을 권
한은 없었지만 제국예산 동의권한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국재상은 오직 황
제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있었지만 정국운영을 위해 제국의회를 고려해야했다. 제국의회
는 보통, 평등 선거권에 의하여 구성되었으나 독일제국에 속해있는 개별 국가들의 의회는
제한 선거권으로 구성되었다. 독일의 중간 시민계층들은 산업혁명의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
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갔지만 19세기 후반 독일사회를 좌지우지한 사람들은 군부를 장
악한 귀족 신분이었다.
○ 독일의 자유이념: 한 개인의 행복과 불행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전가시키는 자유방임적,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이 약했던 독일이었기에 국가의 간섭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자유주의
원리가 별 저항 없이 독일식 자유주의의 원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19세기 독일이 독
자적으로 개발해 낸 자유 이념은 집단의 자유를 개인의 자유보다 우위에 두었다. 독일의 체
제수호 철학자들은 이기적 개인 대신 윤리적 존재만이 보편적 이익을 위하여 활동할 수 있
다고 주장하였으며, 국가만이 인간 윤리의 최고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독일 당국은 이러한
주장을 독일의 공식적 자유이념으로 확립시켰다.
○ 역사주의: 독일에 강하게 남아있던 권위적 가부장적 전통은 서구 자유주의 시각에서 바
라보면 봉건적 잔재로 판단되었다. 근대 이후 독일의 역사적 경험은 국민 개개인의 능력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독일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이념을 개발
해야만 하였고 그러한 이념은 보편성보다는 개별성을 강조하는 19세기 독일의 역사주의에서
뿌리를 내렸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한 시대가 모두 비견할 수 없이 귀중하다는 역사 주의 이념은, 보편적 발전과정을 따라서는 영국을 따라잡을 수 없던 독일이 고심하여 만들어 낸 야심작이었던 것이다.
○ 북독일연방: 1850년대 이후 독일의 산업화는 급진전하였다. 19세기 중엽 중공업, 기계공
업 중심의 독일은 세계의 공장인 영국보다는 뒤졌으나, 그 발전 속도에서는 더 빠른 양상을
보였다. 프로이센은 산업화를 주도하며 독일 전역의 경제를 압도적으로 장악했고 자유주의
성향의 중간 계급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자신감을 키워나갔다. 1861년 탄생한 진보
당(Deutsche Fortschrittspartei)과 1862년 프로이센 재상으로 취임한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가 프로이센 국방예산을 두고 벌인 알력싸움은 비스마르크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
다. 비스마르크는 의회의 저항을 계속되는 대외 전쟁에서의 승전으로 무력화시켰다. 1864년
덴마크,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충돌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했고 비스마르크는 독일연방 대신
새로이 마인강 북쪽의 국가들로 구성된 북독일연방(Norddeutscher Bund)을 조직하였다.
○ 사회보장제도: 독일 제국 수립 이후 재상으로 취임한 비스마르크는 19년 동안 전권을
휘둘렀다. 대외적으로 그의 기본 정책은 새로운 유럽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대내적으로 좌파 자유주의 계열의 중간 시민층, 정치에 관심을 가진 가톨릭교
회 그리고 조직된 노동운동 집단들을 모두 제국의 적으로 간주, 탄압했다. 이 와중에 산업화
에 따라 수가 불어난 노동자들을 포섭하려는 시도로서 혁신적 사회보장제도가 도입되었으나
노동자들은 제국의 편에 서지 않았다.
○ 세계정책: 비스마르크를 몰아낸 빌헬름 2세는 ‘세계정책(Weltpolitik)’을 표방하며 주변
국가들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하였다. 군함 건조, 식민지 확장을 포함한 영토 확장을 골자로
하는 이 공격적인 정책은 독일 제국주의 정책이었다.
○ 제 1차 세계대전: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한 편이고 프랑스, 러시아, 영국이 다른
한 편이었던 1914년의 전쟁은 의도적으로 전쟁을 계획한 측도, 적극적으로 전쟁을 회피하려
한 측도 없었다는 점에서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어렵다. 양 진영 모두 단기전을 염두에
두었으나, 독일이 마르느(Marne)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전쟁은 참호전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1차 대전은 양 진영 모두에게 엄청난 인명 손실과 막대한 전쟁 물자를 퍼붓게
만드는 소모적 장기전이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군부의 권력과 영향력은 계속 커졌다. 공식
적으로는 힌덴부르크(Hindenburg) 원수가 육군의 최고 사령관이었으나 실세는 루덴도르프
(E. Ludendorf) 장군이었고 전쟁 동안 제국 재상과 황제의 권한은 극도로 축소되었다.


<<내용요약>>
1. 독일의 산업화
① 19세기 후반 선진 영국 따라잡기를 국가목표로 설정 -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부정
하는 고전경제학을 극복코자 산업화에 매진하는 새로운 독일적 경제원리 개발.
② 당국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은 단기간의 엄청난 산업화 - 정치 및 사회의 놀라운 변화

2. 독일식 자유주의
① 국가의 간섭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자유주의 원리(독일은 고전적이고 자유방임적인 자유
주의 전통기반이 미약)
② 국가권력의 물리적인 정당화 : 독일의 체제수호 철학자들은 이기적 자유를 포기한 윤리
적 존재인 국가만이 보편적 이익을 위하여 활동 가능한, 인간 윤리의 최고 존재로 주장
③ 개인의 자유 경시: 개인의 자유를 진정한 자유로 생각하는 영국의 자유이념과 크게 다름
④ 세계최초 사회보장제도의 시행으로 빛을 발함.

3. 독일제국의 성립
① 독일 군주들은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근대적인 민족국가 수립의 절박함 인식
② 1848년 혁명을 계기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
③ 프로이센: 통일을 위한 노력 가시화의 중심, 19세기 중반 이후 산업화 주도,
④ 1867년 북독일연방 조직(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소독일주의의 통일 지향)
⑤ 1871년 베르사유에서 독일제국의 수립 공포

4. 1차 대전의 발발
19년의 비스마르크 통치 후 1890년 황제 빌헬름 2세가 등극에 즈음하여 권위주의적 국가에
대한 사회적 불만의 폭발 -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을 계기로 1차 대전에 연루 - 독일제국의 악화 초래


<<생각해 볼 문제>>
1. 독일과 영국의 산업화 과정을 비교해 보자.
산업혁명을 선도했던 영국과 후발주자이지만 빠른 속도로 경제 발전에 성공한 독일은 산
업화 과정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개별 국민들의 자율적인 활동을 통해 산업화를 시작
한 영국과 달리 독일의 산업화 전략은 국가 주도적인 발전이었다. 영국이 내세운 자유방임
주의는 독일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고, 독일의 경제학자들은 역사주의 또는 국민경제학을
새롭게 만들어냈다. 독일 당국은 이에 기초한 정책을 독일 실물경제에 널리 적용했다. 19세
기 후반 독일의 형편에 적합한 경제원리의 개발과 당국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은 독일식 경
제개발은 짧은 기간 엄청난 경제적 성과를 거두었고 독일의 정치 및 사회도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이는 철학부터 국가 정책까지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후 산업화의 후발주자들이 뒤를 이어 채택하는 수단이 되었다.
독일의 자유주의는 영국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개인의 자유를 우위에 두는 영국식 자
유와 달리 독일은 집단의 자유를 개인의 자유보다 우위에 두었다. 한 개인의 행복과 불행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전가시키는 자유방임적,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이 약했던 독일에서는 국
가의 간섭을 정당화하는 이 논리가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독일의 체제수호 철학자들은
윤리적 존재만이 보편적 이익을 위하여 활동할 수 있고, 국가가 인간 윤리의 최고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르면 독일 당국이 펼친 여러 정책들은 능력이 부족한 국민을 올바른 방
향으로 이끌어 가는 과업이었다. 실제로 독일식 자유 이념은 성공적인 산업화는 물론이고
비스마르크의 세계최초 사회보장제도의 시행으로 빛을 발했다.
비스마르크의 사회보장제도는 점점 위협요소로 변해가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기존 체제 안
으로 편입시키려는 정책의지의 결과였지만 한편으로는 온정적 가부장주의의 구현이기도 했
다. 영국의 개인주의적 자유방임적 전통은 국민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발전과정을 따라서는 영국을 따라잡을 수 없던 독일은 자신들만의 고
유한 역사주의를 통해 보편성보다는 개별성을 강조하고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전통을
만들어냈다.

2. 독일 제국의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이후 독일의 역사적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 보자.
2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을 비롯한 각국 역사가들은 독일에서 나치즘이 발호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손더벡(sonderweg: another way) 이론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설명들 중 독일 역사의 특수성에 집중한 역사 서술들을 일컫는다. 학자
마다 조금씩 다른 주장을 펼치지만, 손더벡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주로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 운동이 실패하고 권위주의적인 독일 제국이 성립한 데서부터 나치의 등장 원인을
찾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은
1848년에 정점을 맞았다. 독일에서는 이 해에 자유주의적 민족 정부를 구성하려는 운동이
봉기로 표출되었고, 그 결과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에서 독일의 통일과 입헌 정부 수립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국민 의회는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강제로 해산되었고, 이후
통일된 독일 국가 건설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비스마르크의 주도 하에 보불전쟁
에서 승리를 거둔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 독일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독일 제국 시기에 경제적 근대화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미 1848년에 결정
적으로 굴복한 자유주의 세력은 근대화 과정에서 배제되었고 국가 주도 근대화의 선두에 섰
던 엘리트 집단은 봉건적 지배세력을 중심으로 권위적인 정치, 사회 체제를 유지했다. 독일
통일로 일체감을 갖기 시작한 독일 국민들은 시민의식 대신 권위주의적인 정부에 대한 복종
과 강력한 군사주의를 토대로 하는 독일 민족주의를 학습해나갔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지배
는 중간 계급 뿐만 아니라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던 노동자 및 농민의 사회적 불만을 해결
할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패배는 불만에 가득 찬 국민과 권위주의적 정부가 낳
을 수 있는 최악의 경우였던 셈이다. 전간기의 총체적 혼란 속에서 몰락한 독일 제국과 바
이마르 공화국, 나치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의 일차적 책임은 정치, 사
회적 근대화를 거부한 독일의 지배 계층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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