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와동서양

역사학, 문화교양학과, 논술 등, 방통대 근대화와동서양 요약 정리 7. 독일의 산업화

롤라❤️ 2023. 1. 27.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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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독일의 산업화

<<용어정리>>
○ 관세동맹: 1833년 관세동맹(Zollverein)의 체결은 독일 경제발전을 위한 초석 가운데 초
석이었다. 독일의 여러 나라들은 화폐도 달랐고 사람과 물자 모두 국경을 넘을 때마다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 와중에 체결된 관세동맹은 통일된 경제체제의 필요성을 모든 독일
인들이 절실하게 느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19세기 후반 독일의 급속한 산업화의 성공은
1871년 독일제국의 수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제국수립 이전의 독일을 단순한 농
업국가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제국을 만들어 가는 동안 독일의 경제
역시 대국의 토대를 착실히 쌓고 있었던 것이다.
○ 독일제국: 1871년 탄생한 독일제국은 성립 초기에는 경제적 기반이 불확실했지만, 금본
위제에 입각한 단일 통화제를 시행하고 이를 토대로 강력한 중앙 집중적 경제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독일 경제는 서구 경제권에 통합될 수 있었다. 1875년 프로이센 은행
이 제국은행으로 재조직되면서 국가 주도적 경제개발의 든든한 금융기반이 확립되었다. 게
다가 1879년 영국에서 개발된 철광제련법이 독일에 전해진 후 알자스로렌의 철광 및 칼륨
광산이 집중 개발되어 독일 강철 및 기계공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패전 프랑스가 지불한 50
억 프랑의 전쟁배상금도 독일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독일은 중화학,
금속 기계, 전기 부문을 중심으로 산업화를 추진하여 18세기 말 영국이 주도한 경공업 중심
의 산업혁명에 비견될만한 제 2차 산업혁명을 주도했다.
○ 바이마르공화국: 1차 대전 패전 이후 사회민주당의 주도하에 들어선 바이마르 공화국은
잘 준비된 체제가 아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자유주의적인 정치 체제와 사회복지제도를
통한 생활수준 보장을 목표로 삼았지만 국제 정세의 불안과 무엇보다도 대공황을 전후한 경
제적 위기를 맞아 근근이 존속하는 것으로도 벅찼다. 독일인들은 제국의 붕괴와 공화정의
수립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안정된 삶을 갈구하였다. 패전 이후의 반성은 끝나지 않는 사회
혼란에 대해 정권에게 책임을 묻는 데까지 나아갔고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은 나치당의 등장
을 막을 수 없었다.
○ 독일의 사회민주당: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사회주의 정당인 독일사회민주당
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최초로 정권을 잡았다.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과거 청산보다 사
회 안정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차 대전 패전 이후의 혼란은 신생공화국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베르사유 조약과 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불안정했던 사회민주당 정권은
1925년 우파인 힌덴부르크의 대통령 당선으로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 왕정복고파를 포함하는 연정을 조직했으나 29년 대공황에 의해 회복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 독일의 산업화: 독일은 중화학, 금속 기계 및 전기부문을 중심으로 산업화를 추진했다.
이미 영국이 섬유와 직물로 대표되는 경공업 분야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공업 금
속, 기계 등의 제품은 내구재 성격을 갖는다. 내구재의 소비는 개별 소비자보다 각 국가 차
원의 산업화에 의해 좌우되었다. 게다가 투자되는 자본이 커서 불황에 상대적으로 큰 타격
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독일은행들은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독일의 은행은 중앙은행의 강력한 후원을 받으며 상업기능과 투자기능 그리고 투자신탁의
종합기능을 수행하였다. 독일은행들은 주식과 채권도 거래하면서 자본시장과 투기까지 통제
하였다. 대외무역과 해외 자본투자에 있어서도 은행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독일은
행과 유럽 은행들과의 관계는 교역증진을 위한 재정투자가 주를 이루었고 미국과는 해외자
본 투자가 주를 이루었다. 비유럽지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독일 동양은행, 독일 아시아
은행, 독일 해외 은행 등이 근동, 아시아, 남미 등지의 투자를 주도하였다.
○ 독일과 제 1차 세계대전: 독일 제 2제국의 수립자이자, 사실상 20여 년간 독일의 통치
자였던 비스마르크를 사퇴시킨 빌헬름 2세는 게르만 족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국가의 위신을
높이는 방법으로 다시 한 번 단기전 형태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군부 또
한 황제의 환심을 얻고 군의 입지와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로 전쟁을 진지하게 고려했
다. 독일인들은 흥분과 기대 속에서 멋진 전쟁이 벌어지길 기대하였다. 과시욕에 휩싸인 젊
은 황제와 눈앞의 이익만을 검토하고 있던 중공업 기업가 집단과 또 다른 거대 세력인 군
부, 그리고 들뜬 분위기에 휩싸여 독일인의 우월함만을 맹신하던 독일 국민들은 하나로 똘
똘 뭉쳐 독일을 재기불능의 파멸로 이끌 위험천만한 사업에 뛰어들었다. 독일의 이러한 행
태는 주변 나라들을 불안하게 했다. 이제 남은 것은 힘과 힘의 충돌이었고 그 결과는 독일
뿐만 아니라 유럽대륙 전체에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주었다.
○ 독일의 제국주의: 비스마르크가 자유주의 경제노선에서 보호주의 노선으로 항로를 변경
한 후, 독일은 본격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급진전된 산업화와 주요 항구
도시들이 제국에 편입된 현실은 식민지 획득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1884년부터 1900년 불과 16년 만에 독일은 아프리카와 중국의 일부 그리고 남태평양의 캐롤
라인과 사모아 제도를 식민지로 편입시켰다. 이 기간 독일이 획득한 식민지의 경제적 가치
는 신통치 않았다. 독일의 제국주의는 직접적인 이윤 추구보다 국력 과시용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중공업 기업군은 제품의 재고과잉에서 비롯된 경영 악화를 돌파할 기회로 독일 정부
에게 제국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내용 요약>>
1. 19세기 후반 독일의 경제 상황
1) 제국수립 이전의 경제 상황
① 제국 수립 이전의 독일을 형편없는 수준의 농업국가로 평가절하 하기는 어려움 - 특히
1834년 결성된 관세동맹은 독일 경제 발전의 초석 제공
② 1848-1857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골드 러쉬 - 유럽 경제에 자극, 독일에도 최초의 근대적
신용 은행이 영업을 시작했음.
③ 1857년 국제적 경제 위기 발생 전까지 엄청난 규모의 철도와 중공업 설비들 건설

2) 독일 제국 수립 이후의 경제: 19세기 후반 독일의 급속한 산업화의 성공은 독일 제국의
수립과 긴밀한 연관
① 시장경제 정신에 입각한 통일적 영업 규정 제정 및 제국 전역에의 적용: 사람과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 도량형의 미터법으로의 통일, 체신제도 완성
② 금본위제에 입각한 단일 통화제 시행(1871년) -> 강력한 중앙 집중적 경제 정책 추진.
③ 독일 제국의 경제 기반 안정으로 서구 경제권에 통합 가능.
④ 보불전쟁의 성과에 따른 독일 경제 활성화: 알자스로렌의 직물공업과 풍부한 지하자원/
프랑스의 전쟁 배상금으로 거액의 자본 유입.
⑤ 초창기 제국은 독자적인 수입 없이 각 연방 국가들의 분담금에 의존/ 경찰, 사법, 재무,
교육 등의 행정업무는 각 연방국가에 귀속.
⑥ 1차 대전 발발 이후 개별 연방 국가들의 고유한 민법이 제국 민법에 흡수.


2. 비약적인 농업 생산과 폭발적인 인구 급증: 독일 산업화의 기초 제공


3. 독일 은행
① 산업화와 경제 발전에 기여: 거대 산업 발전은 거대 은행의 자본 투자와 밀접한 관련
- 연합을 통해 조성된 대규모 펀드는 거대 자본이 소요되는 전기, 기계 및 중화학 공업 부
문에 투자됨.
- 대외 무역과 해외 자본 투자에서 중요한 역할 수행(해외 무역과 해외 투자를 촉진시키며
독일의 경제적 영향력을 전 세계로 확대)
- 독일 제국은 독일의 자본이 투자된 해당 국가들과 직, 간접적으로 정치적 관계 설정
② 독점화 초래: 중소 규모 공장들의 몰락 추세, 대규모 공장들의 제조업 장악 강화
- 기업 콘체른이 주요 기업부문 뿐 아니라 관련 산업부문을 함께 지배하면서 독점 일반화
-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에 위험과 해악 초래


4. 제국주의 경쟁
1) 독일 제국의 제국주의정책
① 배경: 자유주의 경제노선에서 보호주의 노선으로 변경/ 급진전된 독일의 산업화와 주요
항구 도시들의 제국 편입/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의 식민지 확보 노력
② 제국 수립 직후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팽창에 관심 별무였으나 상황 변화에 따라 당시 강
대국을 자처하던 독일은 생각을 바꿈. 그러나 독일 식민지의 경제적 효용가치는 別無
2)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빌헬름 2세의 전쟁 선택(게르만족의 우월함 과시, 국가 위신 강화 추구)
① 온갖 외교적 기술을 동원하여 전쟁만은 피하고자 했던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상반됨
② 황제의 환심을 얻고 자신들의 입지를 키우려 했던 군부의 자극과 선동
③ 눈앞의 이익만 계산하는 중공업 기업가 집단 등의 가세.
5. 제3제국을 향하여: 전례 없는 세계대전 이후 패전한 독일은 고통스러운 현실에 직면
① 사회민주당 주도로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도 문제 해결에 실패
② 막대한 전쟁 배상금 지불과 경제공황으로 천문학적인 물가상승 및 초인플레이션 경험
③ 독일의 중간계급 붕괴
④ 독일인들은 구세주의 등장을 열망


<<생각해 볼 문제>>
1. 독일 제국의 성립과 나치의 등장을 연속선상에 놓고 설명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독일 제국의 성립은 권위주의적 체제의 완성이자 동시에 독일의 자유주의적 근대화 경로
가 결정적으로 실패했다는 표시였다. 제국 수립 이전에도 독일은 꾸준히 경제 발전을 이룩
해오고 있었고 그 결과 관세 동맹과 금본위제도를 통한 화폐 단일화 등의 성과를 냈다. 이
전까지는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위주로 독일 제국을 운영해오던 비스마르크는 보호주의 경제
정책으로 노선을 변경한 뒤 제국주의적 팽창에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권위주의적 정부
와 보호주의 경제를 결합한 비스마르크 체제는 사회적 불만을 억압하는 동시에 회유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전개되었다.
보호무역 정책은 식민지 확장과 이어졌다. 독일 제국은 식민지 운영을 통해 큰 이익을 내
지는 못했다. 그러나 독일 경제의 태반을 책임지고 있던 기업 콘체른들은 경제적인 효과를
노리고 과감한 군사 행동을 부추기기 일쑤였다. 세기말의 데카당한 분위기에 휩쓸린 유럽인
들은 전쟁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중공업 위주로 발전한데다 독점 기업
과 은행에 국가 경제가 주로 의존하고 있던 독일은 과격한 기업가들의 의견을 쉽게 무시하
기 어렵기도 했다.
비스마르크를 밀어내고 새롭게 독일 제국을 이끌어나가게 된 황제는 비스마르크가 조심스
럽게 이끌어오던 독일 제국을 전쟁으로 밀고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1차 대전의 발발에는 군
부와 황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제국의 위상 고려, 중공업 중심의 콘체른들의 강력한 요구,
국가 주도 산업화와 후발 산업국으로서의 특징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국제적인 조
약 관계도 작용했으므로 하나의 원인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황제를 비롯한 독일 제국의
지도층이 현상유지를 원하지 않아 무장에 박차를 가했던 것도, 전쟁을 원했던 것도 사실이
다. 전쟁의 패배와 잇단 공황이 나치의 집권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나치 정권의 억압적인 성
격을 독일 국민들이 용인할 수 있었던 기반 역시 제국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2. 독일이 두 번의 세계대전을 주도하게 된 요인을 논의해 보자.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긴장이 외부로 표출된 결과였다. 기존에 유럽 외교
를 규정했던 세력균형원칙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후발 산업국으로서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1870년대부터 이미 흔들리고 있었으며, 1890년대 독일이 세계정책의 기조 아래 적극적인 팽
창공세에 나서면서 완전히 붕괴되었다. 독일은 2차 산업혁명을 이끌어 나간 선두주자로서,
자본과 상품이 누적되어 새로운 시장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 시기 기존 열강들은 전 세
계를 거의 분할한 상태였으므로 독일이 식민지를 얻기 위해서는 세력균형원칙 위에 세워진
기존 질서가 동요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독일은 복잡한 외교적 협상과 동맹의 망 속에서
1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공세적인 노선을 선택했다.
따라서 1차 대전의 발발에서 독일의 책임이 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러나 전쟁의 원인을 모두 독일에게 돌려버린 베르사유조약은 문제가 있었다. 1차 대전으로
가는 길에는 유럽 열강들 간의 외교적 협약과 동맹관계가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무엇
보다도, 이런 방식으로는 독일로 하여금 2차 대전으로 치닫게 했던 원인을 제거할 수 없었
다. 막대한 양의 전쟁 배상금에 대공황의 충격에 빠진 독일은 급속도로 파시즘 체제로 기울
어졌고, 또다시 유럽과 세계에 독일에게 걸맞은 새로운 지위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호전적
인 나치 정권은 전근대적인 기조를 내세우면서도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고, 군수산업이 비약
적인 발전을 보이는 가운데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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