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와동서양

역사학, 문화교양학과, 논술 등, 방통대 근대화동서양 요약 정리 14. 중국이 세계의 중국이 아닐 때

롤라❤️ 2023. 1. 31.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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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중국이 세계의 중국이 아닐 때

<<용어정리>>
○ 아편전쟁: 1840년~42년에 걸쳐 영국과 중국 사이에서 일어난 첫 번째 전쟁. 영국의 아편
을 중국이 소각한 것이 일차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에 아편전쟁이라 불린다. 18세기 내내 은
을 흡수하며 무역 우위를 누렸던 중국은 영국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가져와 팔기 시작
하면서부터 무역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누적된 무역적자가 내수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아편 흡연이 미치는 해악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중국 정부는 임칙서를 파견해 아편
을 금지하고자 했다. 임칙서는 영국을 비롯한 각 국가의 상관에서 아편을 몰수해 소각하는
강경책을 선택했고, 이 조치가 영국의회의 파병결의를 부추겨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은 청의
일방적인 패배와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의 조인으로 끝났다.
○ 개항: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대외무역 통제 정책이 서구 열강에 의해 폐지된 사건을 의미
한다. 동아시아 3국은 대외 및 대내적 통제를 위해서 특정 항구만 국가 관리 아래 개방해왔
다. 그러나 아편전쟁 패배 이후 청이 남경조약을 통해 영국에게 다섯 개 항구를 개항한 뒤,
일본과 조선도 차례차례 서구 열강의 압력을 받아 개항 혹은 개국을 하게 된다.
○ 불평등 조약: 국제 조약 중 한 측에만 일방적으로 특수한 권리나 의무를 부과해 대등하
지 않은 조약을 의미한다. 18세기 이래 서구 열강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각 국가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자주 등장한다. 중국은 아편전쟁 패배 이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인
남경 조약을 맺었다. 관세자주권 상실, 영사재판권, 최혜국대우 등이 주 내용이었다.
○ 18세기 상품 경제: 18세기에 중국의 경제는 고도의 상업화 혹은 상품화가 진행된 단계
에 있었다. 경제 생산과 인구는 모두 오랫동안 상승국면에 있었다. 감자, 고구마 등 새로운
작물 재배나 산간지역 이주 등으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노동 분업이 이루어져 양자강 중하류를 중심으로 농촌수공업이 광범위하게 등장했다. 상품
화에 따라 장거리 무역이 늘어나면서 은 유통 및 지방 은행권 발행 등 결제 화폐시스템이
발전하였다. 이런 지속적인 경제 팽창은 18세기 후반부터 인구 증가로 자원이 고갈되면서
한계에 부딪혔고, 19세기에 들어서 아편이 유입되자 은 유출량이 유입량보다 많아지기 시작
했다. 이러한 위기가 심화되면서 중국에서는 경기 불황과 내란이 발생했다.
○ 은 유통과 아편 수입: 중국은 16세기부터 유럽과의 무역에서 압도적인 흑자를 기록해왔
다. 비단, 도자기, 차 등의 상품이 유럽에서 중국으로 은을 지속적으로 유입시켰고, 중국은
풍족한 내수 경제를 누렸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아편이 수입되면서 은의 흐름은 역전 된다. 아편 수입의 폭증은 그만큼의 은 유출을 의미했고, 이 시기에 영국은 산업혁명을 겪으
며 세계적인 수준의 고도성장을 시작했다. 은 부족은 농민들의 세금 부담이 늘어났다는 것
을 의미했다. 16세기부터 이어지던 중국의 우위는 추락세로 돌아선 것이다.
○ 난징 조약: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이 1842년 8월 29일 영국과 체결한 조약으로, 청이
난징 함락 직전 영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이루어 진 중국 최초의 불평등조약. 협정관
세를 받아들이는 관세자주권의 포기, 영사재판권, 최혜국대우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청조의 권위는 심각하게 실추되었다.
○ 태평천국운동: 아편전쟁 이후 피폐해진 농민들이 제1차 중영전쟁의 패배와 청조의 권위
추락을 계기 삼아 청조를 타도하고 태평천국을 세우기 위해 일으킨 운동. 홍수전이 세운 배
상제교는 처음에는 개인의 종교적 구원을 중시했으나, 점차 정치적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
었다. 결국 1851년 배상제교 회원들은 태평천국을 선언하고, 홍수전이 천왕에 즉위했다. 이
들은 난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고 50만 규모의 병력까지 갖추었으나 1864년 수도가 함락되
자 급속히 몰락했다. 태평천국 운동은 청조의 위기 대처 능력을 심각하게 훼손시켰고 부유
한 양자강 유역의 파괴와 2천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낳았다.
○ 청일전쟁: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과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개입하며 일어난 전쟁. 그
결과 일본이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중국은 조선에 대한 종
주권을 포기하고, 일본에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고 일본에게 각종 특혜를 인정하였다. 청일
전쟁에서의 패배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이 조공국 조선을 상실했다는 것은 중화제국 질
서가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의미였다. 반면 일본은 근대화의 성공 사례로서 중국 정부는 물
론이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재평가 되었다. 허약해진 중국에 대한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다.


<<내용요약>>
1. 아편전쟁: 중국 근대의 기점
① 배경: 임칙서의 강경조치 - 아편 흡연자 사형론을 지지했던 임칙서가 1839년 흠차대신으
로 임명되어 아편 무역의 온상지인 광주에 파견, 아편매매 엄금, 아편의 몰수와 공개 소각.
② 아편전쟁에서의 청조의 패배
- 남경조약, 호문조약 등 불평등조약으로 청조의 권위 실추
- 기독교의 유입, 해운의 흥성 등의 영향으로 태평천국운동 발생
③ 청조의 패배로 동아시아 국제질서인 중화주의적 조공체제 재편
- 18세기 말부터 청조는 노화의 징후, 19세기 경기불황과 내란
- 17세기 이후 지속되었던 동아시아 대외무역에 대한 중국의 통제 붕괴
- 동아시아국가들의 개항: 청(남경조약), 일본(가나가와조약과 안정5조약), 조선(강화도조약)
- 조공국들의 조공질서에서의 이탈: 류큐왕국은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편입(1879년), 베트
남(1884년 청불전쟁이 계기), 조선(1894년 청일전쟁이 계기)
④ 동아시아 국가들의 내정에서의 지각 변동
중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황제지배체제 붕괴,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수립
일본: 1868년 메이지유신, 1889년 아시아 최초의 입헌군주국화
⑤ 대등한 주권국가 사이의 근대적 조약체계, 불평등조약체제[반식민지], 제국주의체제[식민
지]로 재편 - 중국은 남경조약을 시작으로 각종 불평등조약을 강제당하며 점차 반식민지적
상황으로 전락.
2. 중국의 경제
① 개항 당시 중국은 부강한 국가 중 하나:
- 18세기에 중국의 경제는 고도의 상업화 혹은 상품화가 진행: 경제 생산과 인구는 오랫동
안 상승국면
- 인구의 폭발적 증가(감자, 고구마 등 새로운 작물 재배 및 산간지역 이주 등)
- 양자강 중하류를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농촌수공업의 등장
- 장거리 무역의 발전에 따른 결제 화폐 시스템 발전(은 유통 및 지방 은행권 발행 등)
② 18세기 후반부터 인구 증가로 환경 고갈 및 생태계 파괴
③ 19세기 은의 유출 증대와 위기 심화, 경기 불황과 내란 발생
- 가경연간에 발생한 백련교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재정 상태 악화
④ 1830년대 아편수입의 본격적 문제화
- 19세기 이후 아편 밀수의 비약적인 증가로 그 결제수단인 은의 막대한 유출
- 통화 공급 축소, 물가 하락, 농민의 세금 부담 가중 등 경제에 심각한 영향
- 처음에는 팔기군의 군기 문란 등 사회문제로 주목 받았으나 1829년 장원의 상주 이후 은
유출과 관련하여 논의
3. 청일전쟁의 패배: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


<<생각해 볼 문제>>
1. 동아시아와 여타 비유럽 지역의 근대로 진입하는 과정을 비교해 보자.
동아시아를 비롯한 비유럽 지역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유럽의 영향을 받으며 근대화를
겪었다. 직접 지배를 겪은 지역과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지역이 나뉘고, 식민 지배를 당했던
지역들도 이전의 역사와 당대의 사회상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종종 이런 차이는 근대화
를 치러낸 각 지역의 국가들이 서로 다른 문제를 맞닥뜨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중앙집권적 국가의 틀을 일찌감치 갖추고, 오랜 기간동안 정치․
경제․문화적 측면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동아시아는 여타 비유럽 지역과는 사뭇 다
른 근대화 과정을 겪었다. 결정적으로 식민경험의 양상에서 상당한 차이가 난다. 동아시아 3
국이 서구 열강에게 직접적으로 식민 지배를 당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경우 불평등 조약과
수탈, 일부 영토 상실 등의 경험이 있지만 식민지가 되진 않았고,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비유럽 지역은 서구
열강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은 국
경선까지 서구열강의 자의적인 분할을 따랐을 정도이다. 이 두 대륙은 유럽과 접촉해 근대
화를 겪는 과정에서 강제적인 인구 유출과 유입을 겪었고,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인구구성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는 유럽이 세계무역에 뛰어들어 산업혁
명의 자극제가 될 교역을 시작할 때부터 관련이 깊었고 이후 유럽의 근대화에 밑거름이 된
원료와 시장을 제공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굴곡을 겪지 않은 지역, 국가는 없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나름의 주체성
을 확보하고 근대화를 진행한 편이다. 한국의 경우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 때문에 양상이
달라지지만, 어쨌든 서유럽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장기간에 걸쳐서 경험
한 대부분의 지역이 여전히 반 예속 상태 빠져 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동아시아의 처지가
퍽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도와 서아시아를 제외하면 기존 사회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여전히 충격을 회복하지 못한 채 포스트 식민주의적 주변부의 지위에 머물러
있다. 인도와 서아시아는 양자 모두 오랜 기간에 걸친 중앙집권국가의 역사와 자원을 바탕
으로 나름의 근대화 성과를 얻어냈다. 그러나 이들 지역 역시 식민지배의 유산인 지역, 종교
분쟁에 휘말려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이나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연이어 벌어지는 중동
전쟁 모두 식민시대의 유산인 셈이다.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대다수 국가들이 독재정권의 경
험을 가지고 있거나 여전히 독재․권위주의 정권의 통치 하에 있다.
2. 청일전쟁 이후 조선의 중국관과 일본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 조선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는 정치, 경
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청나라와 조선이 근대화의 격류 속에서 일
본에 의해 추월당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청나라가 경
험한 충격은 이전의 아편전쟁, 일본의 대만출병, 청불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청
나라는 가장 중요한 조공국인 조선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무시해왔던 일본을 근대화의
성공사례로 인정해야 했다. 청에서는 일본이 채택한 입헌군주제, 더 나아가 공화제를 미래의
대안으로 생각하는 개혁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선 역시 이러한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서구 열강에 의해 이권을 침탈당하던 청과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각종 국가의 이권 침탈과 함께 일본의 식민화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청나라가 진 부담은 2억 량이라는 공전의 배상금과 대만 할양 등 이외에도 열강이 중국을
분할하지 않을까하는 절실한 위기의식을 확산시켰다. 조선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라의
종주국에서 벗어나 독립국의 지위를 갖게 되었지만, 대신 일본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미치
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조선에서 역시 일본을 근대화의 모범사례로 생각하는 세력이 등장
하기 시작했다. 근대적 개혁을 두고 갈등을 벌이던 수구파와 개혁파는 열강들의 움직임에
따라 이합집산 했고, 청일전쟁 이전부터 조선의 정쟁에 개입해왔던 일본은 승전 이후 조선
의 운명을 판가름할 중요한 세력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지 16년 만에 청조는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붕괴한다. 신해혁명은
만주족의 구축(驅逐)이라는 한족 민족주의를 내건 혁명파와 청조의 무능함에 수세적으로 혁
명을 지지한 개량파가 합작하여 성취한 것이었다. 양자의 결합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망국’의 위기감이었다. 실제로 조선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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