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와동서양

역사학, 문화교양학과, 논술 등, 방통대 근대화와동서양 요약 정리 2. 동양(동아시아)의 근대화

롤라❤️ 2023. 1. 25.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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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동양(동아시아)의 근대화


<<내용 요약>>
1. 근대 직전의 동양 다시보기
① 동양의 대항해시대와 무역붐: 1520년대 이후 동아시아의 조공 책봉 체제와 무역에 엄청
난 변화 발생
- 배경: 당시 세계의 무역 결제 수단이었던 은이 일본에서 대량 산출 - 일본산 은은 아메리
카산 은과 더불어 동아시아에 유입되어 무역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킴
- 곳곳에서 조공 무역 체제의 범위를 벗어나는 무역들이 행해짐: 은 생산을 통해 막대한 구매력을 획득한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비단과 차를 수입한 것이 대표적인 예/ 왜구, 중국 남
부 해상 지역의 정씨 부자 세력,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 서양 세력이 동아시아 무역
에 적극적으로 참여
② 동아시아의 정치적, 군사적 변화
- 당시 북방과 만주지역의 무역을 주도했던 누르하치의 후금 건국(1588년)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1590년)
-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동아시아의 무역 붐을 타고 성장한 신흥 세력들의 전통적
인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군사적 도전
- 17세기 말에 청, 조선, 도쿠가와 바쿠후(막부)의 성립: 이후 약 200년 동안 지속된 체제

2. 동양, 세계경제의 중심
기존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적어도 산업혁명전까지는 동아시아, 특히 중국, 인도, 일
본의 경제적 수준이 동시대 유럽보다 뒤지지 않았고 오히려 앞서는 측면도 있었다는 주장
① 선진적인 중국경제: 18세기 중국 양쯔강 하류지역에서 고도로 발달한 농촌 수공업과 상
업을 바탕으로 한 무역 흑자, 19세기 이전까지 동아시아 세계 경제의 중심의 자리 차지
② 중국기술의 주변지역으로의 이전: 견직, 조선, 제당 기술의 발달을 토대로 이루어진 중국
의 경제적, 기술적 선진성의 전파
③ 근세일본의 경제적 성장: 경지 확대와 정농주의를 통한 농업 생산력 증대를 기반으로 생
사, 면화, 차 생산에서 중국을 따라잡을 정도에 이르렀다.

3. 동양에서 근대의 전개: 중국적 세계질서(중화체제)의 동요와 해체
① 아편전쟁과 서양의 충격: 1820년 이후 중국에서 은의 유출 - 당시 유럽 산업의 높은 성
장률, 중국 은이 다시 유럽으로 역류되는 현상, 영국은 급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청과의
아편전쟁에서 승리, 청은 다시 애로호 사건으로 서양 열강과 전쟁을 벌였으나 역시 패배
② 청의 근대화 노력, 양무운동: 서양을 이길 수 있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육성하기 위해 양
무운동을 전개했으나 근본적인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③ 청일전쟁과 중국적 세계질서의 종말
- 중국의 패배로 양무운동의 실패 입증
- 일본의 승리는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큰 변화 초래: 조선은 청의 권위 부정
④ 청불전쟁에서의 중국의 패배: 베트남은 청의 지배에서 이탈

4. 동양의 근대화와 일본
① 중화체제에 대한 일본의 도전
중화 체제 해체 이후 동아시아의 주도권 장악 - 서양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정부
최대의 외교 과제로 설정 - 아시아에 대해서는 강경한 자세(조선에 강화도 조약이라는 불평
등 조약 강요, 타이완에 군대 파견) - 1880년대에는 후쿠자와 유기치의 탈아입구론으로 유
럽의 일원이 되려는 움직임 가세
② 일본근대화의 성공요인: 사무라이 층의 적극적인 개혁 운동 참여 및 군사적 감각, 바쿠후
나 한의 경쟁적인 정보수집, 서양 열강에 대한 높은 위기의식 등
③ 동양의 근대화와 일본의 충격: 근대화 성공을 바탕으로 조선 등 침략

5. 근대동아시아의 경제
① 19세기 중엽 이후 중국의 농촌 공업과 상업은 경제적으로 우월한 서양의 공세 속에서도
존속 - 중국의 대규모 기계제 공업의 계속 성장.
② 일본의 동아시아 경제권 성장에 기여: 19세기 후반 방적업 및 방직업의 성장으로 대외 경쟁력 확보 - 동아시아 각국에 소비재를 대량으로 공급 유통시킴으로써 동아시아 경제권
성장에 기여
③ 일본의 패망: 군사력을 동원한 엔 블록 경제권 모색 중 결국 패망

<<용어정리>>
○ 은 유통: 근대 이전 세계 무역의 결제 수단은 대부분 은이었으며, 따라서 당시 은 유통
은 화폐의 이동 내지 무역의 움직임과 일치했다. 1520년대 이후 중국의 회취법을 도입한 일
본의 은 생산량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동아시아의 무역량이 치솟았다. 아메리카의 은을 앞
세운 서구 세력과 함께 왜구 등 기존 조공 체제의 바깥에서 무역활동을 증대시킨 해상세력
의 등장은 경제적 변화 뿐 아니라 정치적 격변으로 확장되어 청 제국과 도쿠가와 바쿠후의
수립에 큰 영향을 미친다.
○ 대항해: 세계 문명의 후진 지역이던 유럽은 신대륙의 ‘발견’을 전후해 대항해 시대에 접
어들었다. 선두에 선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와 아메리카를 향해 적극적으
로 진출하고 있었다. 특히 포르투갈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말라카 왕국을 점령했고, 동아시아
의 무역 붐에 뛰어 들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동시에 마닐라를
건설했고, 네덜란드는 타이완과 인도네시아의 자바를 거점으로 삼았다.
○ 무역 붐과 동아시아의 재편: 은 유통의 확대로 인해 동아시아 무역 붐이 일어나고, 조
공 무역 체제가 흔들리자 명나라와 무로마치 바쿠후는 각각 유명무실해진 민간 무역 금지와
감합무역을 폐지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무역 붐의 영향을 받아 활발해진 만주지역의
교역을 통해 성장했고, 오다 노부나가는 유럽과의 무역에서 얻은 조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세력을 확장했다. 후금과 일본은 조선 침략을 통해 기존 동아시아 질서에 도전했고, 세 차례
의 전쟁 이후 명을 누른 청제국과 전국시대를 끝낸 도쿠가와 바쿠후가 성립했다.
○ 유럽 중심주의: 유럽이 대항해시대 이후 세계를 제패하면서 국제 무역에서도 유럽 중심
의 세계 체제를 구축해왔다는 시각은 최근 들어 유럽 중심주의로 비판받고 있다. 다수의 연
구자들은 적어도 산업혁명 전까지는 동아시의 경제적 수준이 동시대 유럽에 비해 앞섰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기존 역사가들이 19세기 말 이후 전개된 서세동점을 이전 역사에 소급 적
용해왔다며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 기술 이전: 근세 동아시아의 특징 중 하나로, 청의 선진 기술이 주변 지역으로 서서히
전파되어간 현상. 동아시아의 16~17세기 교역 붐을 통한 상호교류 확산과 더불어 정치적, 군
사적 이유로 인한 인적 이동이 매개가 되었다. 동남아시아의 화교 사회, 타이완 한인 사회
및 명나라 유민의 이동과 임진왜란 시기의 조선인 포로 등이 인적 이동으로 인한 기술 이전
의 대표적 사례이다. 동남아시아의 비단 제조업이나 조선업이 기술 이전을 통해 성립했다.
○ 정농주의: 일본의 농업생산량 급증을 가능하게 한 농업 조직 방식으로, 노동집약적 농업
을 통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늘리는 방식. 17세기 이후 일본은 급격한 인구 증가와 생활
수준의 상승을 동시에 경험했다. 이는 농업 생산량의 증가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처음에는 개간을 통한 경지 증가가 이루어졌으나 이 방법이 한계에 부딪히자 노동 투입 증
가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늘리는 방법이 행해졌다. 효율적인 농법과 농구 개량, 비료 사용
등 농업기술의 전반적 개발이 필요했으며, 소농 단위를 중심으로 하는 근면 혁명이 이를 가
능케 했다.
○ 아편 전쟁: 무역을 둘러싼 중국과 영국의 마찰은 결국 제1차 중영전쟁(1840-1842), 즉
아편전쟁을 불러왔다. 이 전쟁은 영국에 홍콩 할양, 5개항 개항, 배상금 지불 등을 내용으로 하는 난징조약의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이미 1820년대부터 은의 순유출이 시작되면서 흔들
리고 있었던 청의 위상은 아편전쟁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일본은 아편전쟁의 패
배가 서양의 군사적 우위를 증명한다고 보고 본격적인 대비에 나서기 시작했다.
○ 양무운동: 중영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을 계기로 서구의 기술과 교육에 주목한 청의 관리
들은 1860년대 중반부터 부국강병을 위해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는 내용의 개혁을 추구했다.
군수 산업을 비롯한 근대적 산업의 발전, 신식 교육 기관 설립 등 광범위한 규모의 서구식
개혁을 도모했으나 청일전쟁 때에 운동이 실패했음이 드러났다. 전통적 경제 구조의 지속,
추진 세력의 지역적 한계, 부패와 비능률 등이 그 원인이 되었다. 양무운동의 실패 이후 변
법론이 새로운 개혁의 방법론으로 힘을 얻게 되었다.
○ 중화 체제의 해체: 동학농민전쟁을 빌미로 조선의 내정 간섭을 둘러싸고 청과 일본 양
국이 충돌했다. 전쟁의 결과 일본이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중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고, 일본에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고 일본에게 각종
특혜를 인정하였다. 조공체계를 이루던 국가들 중 베트남을 비롯한 대부분을 상실한 청은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조선을 잃으면서 중화체계의 해체를 목도하게 되었다
○ 이와쿠라 사절단: 1871년, 메이지 정부가 서양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선하기 위해 유
럽과 미국에 파견한 사절단으로 정부 주요 인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양 열강이 일
본을 아직 근대화가 덜 된 국가로 여기고 상대하지 않아 이와쿠라 사절단은 조약 개정에 실
패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근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 정한론: 아시아에 군사적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의 입장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으
로, 조선을 정벌하자는 공격적인 태도. 1876년 강화도조약은 조선을 강제로 개항하는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의 정한론이 구체화된 첫 번째 시도였다.
○ 주권선과 이익선: 1890년 일본 수상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국회 첫 연설에서 했던 발언.
이는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 주권선인 일본 열도를 방어하는 것은 물론, 일본의 이익에 관계
되는 이익선인 한반도에까지 군대를 파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일본의 국익에 해
가 된다면 언제든지 조선에 무력으로 개입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 일본 유학 붐: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로 타국에 모범사례이자 경계
대상이 되었다. 청과 조선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은 근대화된 일본에게 충격을 받는
한편 구체화된 위협에 맞서기 위해 일본을 통해 근대화의 사례를 배우고자 했다. 조선의 정
부사절단 수신사를 필두로 조선, 중국, 베트남 등지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지리적인 이점과 같은 문화권이라는 동질감이 이러한 유학 붐을 더욱 부추겼다.
○ 재래 산업과 기계제 공장: 서양의 공업화 이전에 근세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가족 단위
농업 경영과 근면 혁명의 영향으로 농촌 공업이 상당한 수준까지 발달해 있었다. 이러한 재
래 산업과 유통망은 동아시아 무역 체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19세기에 서
양의 공세를 맞이하고서도 많이 살아남았다. 서양의 영향을 받아 기계제 공업도 꾸준히 발
전했다. 방적업과 방직업은 인도, 일본, 중국에서 기계제 공장이 성공적으로 정착한 대표적
부문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산업화는 대규모 기계제 공업과 영세, 중소 공업이 공존하는 구조
로 전개되었다.


<<생각해 볼 문제>>
1. ‘유럽중심주의사관’의 특징과 그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유럽중심주의 사관은 지금까지 근대 역사에 대해, 유럽이 대항해시대 이후 세계를 제패했
고 국제 무역에서도 유럽중심의 세계체제를 구축해왔으며 타 지역에 대해 압도적인 경제적
우위를 확보했다고 서술해왔다. 이런 관점은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경제성장과 정복에 따른
영향력 증대를 산업혁명 이전으로 소급 적용시킨 결과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산업혁명 전까지 동아시아는 유럽에 비해 경제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중국은 이
미 18세기에 양자강 하류지역을 중심으로 농촌수공업과 상업이 고도로 발달했고, 기술, 제도
등 여러 측면에서 유럽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GNP계산을 통해 1800
년까지도 중국이 세계 경제의 중심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더
라도, 유럽 중심의 역사 서술이 산업 혁명 이전의 유럽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비판
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2. 근대 이후 조선의 전통 산업의 전개와 그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보자.
조선시대의 공업은 주로 농촌의 자급자족을 위한 수공업에 머물렀다. 보다 전문적인 수공
업자들은 주로 국가에 소속되어 지배 계급의 사치품을 생산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사
적인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지만, 국가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경제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농업이 먼저 변화하기 시작했다. 상품유통을 전제로 하는 농업이 발
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토지 소유 양상에도 변화가 일어나, 개간과 매입을 통한 토지겸병
이 성행했다. 이에 따라 늘어난 소작농은 현물로 납부하던 지대를 점차 화폐로 납부하게 되
었다.
본격적인 공업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광업은 조선 시대 내내 강력한 국가 통제
하에 묶여 있다가, 후기에 들어서 개인의 개발이 허용되었다. 여기서 자본을 축적한 상인들
도 있었다. 대동법의 실시로 등장한 공인 계층 역시 자본을 축적했다. 19세기 말 공인들은
어용물자를 조달하는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사상들은 공인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공인권
을 사들이기도 했다.
개항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근대적 기계공업 생산품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면제품이
상당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조선의 수출은 주로 곡물과 금, 소가죽 등에 한정되어 있었
다. 일본과의 미면 교환 체제는 점차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조선 내의 수공업 면포를
몰락하게 만들었다. 전문적인 수공업자 뿐 아니라 가내 생산하던 농민도 이 영향력에서 자
유롭지 못했다.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와 갑오개혁을 통해 기존의 호조가 탁지아문, 탁지부로 개편되면서
은본위제와 세금 금납제, 도량형의 개정, 은행과 회사의 설립 등을 골자로 하는 2백여 조항
의 근대적 경제로의 개혁 정책이 실행되었다. 이후 광무개혁 때에는 광산, 홍삼, 철도 수익
을 황제가 장악했으며, 관료, 민간 자본가들이 국가 권력과 결탁해 기업, 은행을 세우고 근
대식 설비를 도입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개항장, 객주조합, 보부상, 시전상인들도 정부에 상
납 및 납세를 통하여 비호를 받았다. 그러나 전통 산업의 활발한 부흥에는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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