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추천여행

(익산) 가족들과 함께 한적해서 가볼만한 비대면 여행지 망모당을 소개합니다!

롤라❤️ 2020. 3. 24.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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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가을 하늘처럼 파랗고 구름 한 점 없는 날 익산 왕궁면 광암리 망모당의 주차장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처럼 한가롭기만 합니다. 마을은 동향이지만, 마치 따스한 햇볕을 포근히 안은 남향 마을 같은데요, 오늘 여기서 만날 분을 생각하니 가슴이 콩닥콩닥 뜁니다.


충숙공 표옹 송선생 강생 유지비가 마치 신도비처럼 인도하고 있습니다.


고즈넉한 마을 한쪽 야트막한 야산 아래 조그마한 가옥이 하나 있는데요, 얼추 보면 조선시대 어느 마을에 온듯한 착각이 듭니다. 원래는 이부근이 표옹이 살던 은거당이었다는데요, 현재는 길이 났고 뒤뜰의 별장이었던 망모당만 남아 있습니다.


표옹 송영구가 쓴 '망모당 상량문 육위시'시비가 서 있는데요, 표옹이 동, 서, 남, 북 하늘과 땅을 돌아가면서 노래한 시인데 참 특이한 형식의 시입니다. 한번 읊어볼까요?

동쪽으로 던지니,

앞들의 봄 농사 해마다 풍년들기 소원하네. 곡식 심는 것이 마침내 밥과 술을 위함이요,

이 집 열고 제사드림이 농사짓는 보람일세.

서쪽으로 던지니,

큰키나무 천 쪽의 구름과 가지런히 어우르고, 가지들이 춤을 추는데 바람이 노래 않으리오.

내 사랑하는 사람아 달도 내려와 품으려 하네

남쪽으로 던지니,​

저만치서 울타리 숲은 강남의 녹나무 같아라. 까치와 길조들이 촘촘한 가지에 둥지를 틀며,

훈풍에 상서로운 햇빛 깨끗한 남기에 비치네.

북쪽으로 뻗치니,

백년의 솔과 노송나무 벽공에 바라다 보이네. 후손은 효행의 보답받아 장수하고 창성하여,

하늘같이 망극한 그 은혜 길이길이 사모하리.

위쪽으로 뻗치니,

하늘이 내는 제목은 얼마나 높이 자라나는가. 진세가 멸망하는 노래소리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의 구름 기운은 장대한 용의 형상이로다.

아래쪽에 뻗치니,

방은 겨울날에 마땅하고 마루는 여름에 좋아, 언제나 그리운 건 봄날 산야의 아름다움인데,

최상의 어여쁜 건 천봉에 달 뜨는 가을밤일세.


망모당은 조선시대 문인 표옹 송영구가 1605년 선친을 여의고 완주군 봉동읍 우산리에 있는 선영을 망모하려 세운 건물인데요, 선영까지는 직선거리로는 3km 떨어졌고 길로는 4km 떨어졌지만, 익산 보석 박물관 뒤쪽 마을이라 망모당에서 보인다고 합니다.

망모당을 봤다면 표옹 선생의 묘소가 있는 우산정사까지 다녀오면 더 뜻깊은 문화 탐방이 되겠어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 망모당의 문은 다른 지역 서원과 달리 항상 열려 있습니다.

문고리에 자물쇠가 걸려있지만, 잠그지 않아 열고 들어갈 수 있는데요, 하루에 몇 분이나 찾아올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선조를 잊지 않고 찾아오는 관광객과 후손에 대한 자그마한 배려이지 싶습니다.


망모당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정사각형 건물인데요, 너무나 깨끗하게 관리돼 깜짝 놀랐습니다. 마당에 잡초 한 포기 나지 않고 벽과 기둥은 물론 마루까지 반질반질했습니다.

후손은 진천 송씨 우산종중이라고 하는데요, 망모당이 있는 광암리에도 후손들이 살며 잘 관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표옹 송영구(1556~1620)는 진천 송씨로 익산 왕궁면 광암마을 출신입니다. 1584년 29세 때 서총대과에 급제한 뒤 경상도 관찰사 및 동지중추부사,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두 차례에 걸쳐 중국 사신으로 다녀왔고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던 이항복, 항신, 신흠, 이정구 등 수많은 영사들과 절친한 교우관계로 시문을 즐겨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광해군 대에 인목대비의 폐비론에

의연히 반대하다 관직을 박탈당하다.




광해군 대에 인목대비의 폐비론에 의연히 반대하다 관직을 박탈당하고 도성 밖으로 내 쫓김을 당했는데요, 이러한 절의 정신으로 당대에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인조반정 이후 복관돼 예조판서에 증직 되었습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숙소의 잡부가 남화경을 외우는 것이 이상해 물었더니 과거를 보기 위해 북경에 왔으나 여러 차례 낙방해 지금은 호구지책으로 객사 잡주로 일하고 있다고 하자, 과거 시험에 관한 모범답안 쓰는 법을 조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책과 상당한 액수의 돈도 주었다는데요, 표옹의 가르침을 받은 명나라 선비는 마침내 과거에 장원급제했는데 그 선비가 바로 명나라 문장가 주지번입니다. 주지번은 1606년 명나라 황제가 첫 손자를 얻자 주변국에 알리기 위한 사신으로 조선에 와서 공무를 마치고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표옹을 찾아 나섰다는데요, 의리를 넘어 우애로운 주지번이었군요.


그는 전주 객사에서 하루 묵으며 풍패지관이란 현판을 써주었는데요, 표옹이 살던 마을에 와서는 망모당의 편액을 써 주고 표옹의 묘지도 잡아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여기까지 왔음에도 만나지 못했다는 건데요, 당시 명나라 사신이 전라도까지 행차하면 돈이 많이 들것을 우려해 조정에서는 표옹이 죽었다고 했지만, 주지번은 믿지 않고 찾아 나선 것입니다.


표옹 송영구 선생의 초상화는 망모당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인자한 얼굴에 문신 다운 지혜로움이 엿보이는데요, 잘 생기기도 하셨어요.



주지번이 포용이 죽었다고 해도 익산으로 길을 떠나자 표옹 가족에 미리 기별을 해 빈소를 차려놓으라고 했다는데요, 표옹의 집을 찾은 주지번은 빈소를 보고 크게 낙심해 망모당이란 편액을 써주고 그의 묏자리까지 정해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표옹선생은 죽은 것이 아니고 평안도 대동역참에 근무했다는데요, 참으로 이상하죠? 명나라 사신이 오고 갈 때 반드시 들르는 곳은 평양일 건데요, 표옹이 모를 리가 없잖아요. 결국 알면서도 모른체했다는 건데요, 그럴만한 사정은 표옹이 당시 정권을 쥐고 있었던 북인에 의해 대동찰방으로 좌천되었기에 아마 나서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1607년에 지어 400년이 지난


건물은 1607년에 지어 400년이 지났건만 관리 상태가 매우 양호합니다.

벽에는 중수기 등 많은 편액이 있는데요, 표옹과 교유했던 문인들의 글입니다.


건물은 난방을 하지 않는 마루 형식이기에 이 방은 제사 도구 등을 보관하는 방인가 봅니다.

창호지 하나 뚫린데 없이 깨끗했어요.




건물 뒤로 빙 둘러 철쭉이 일제히 꽃을 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표옹 선생은 다시 조정에 들어와 1613년 성절사 대표로 다시 명나라에 가게 되는데요, 그곳에서 죽은 줄 알고 있을 주지번과 재회합니다. 당시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야기했을 건데요,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주지번은 표옹이 돌아갈 때 귀중한 책을 여러 권 선물했다는데요, 다 돌려주고 분홍 글씨로 쓴 대학책 딱 하나만 받았다고 합니다.


명나라 주지번과 국경을 넘나든 우애를 보여준 표옹 송영구 선생.

그의 후손들은 여전히 익산의 명망가로 이어오고 있는데요, 왕궁리 저수지와 함벽정을 지은 표정 송병우 선생도 후손이라고 하더군요.

언제 시간 되면 왕궁리 저수지와 함벽정도 둘러보고 그 인근에 있다는 우산정사와 송병우 선생이 살던 고택도 찾아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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